그래픽=CGIG·김성규

미국 증시에서 상장지수펀드(ETF) 열풍이 거세다. 신규 ETF 출시 속도가 가팔라지면서 미국 시장의 ETF 숫자가 사상 처음으로 상장 주식 종목 수를 넘어섰다. 투자자 입장에서는 다양한 선택지가 비용 절감과 세금 혜택을 제공하는 장점이 있지만, 지나친 상품 홍수는 투자자들에게 ‘선택 장애’를 안기고 있다. 한국 시장 역시 ETF가 빠른 속도로 늘어나면서 하루 거래량조차 미미한 이른바 ‘좀비 ETF’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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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블룸버그가 모닝스타 집계를 인용한 보도에 따르면, 현재 미국 증시에 상장된 ETF는 4300개를 넘어섰다. 이는 상장 주식 종목 수(약 4200개)를 넘어선 것으로, ETF 숫자가 상장 주식 수를 앞지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특히 올해 미국에선 ETF 출시가 급히 늘었다. 올해 상반기에만 469개가 새로 상장했는데, 이는 지난해 상반기 대비 50% 증가한 수준이자 최근 5년 평균과 비교하면 무려 140%나 늘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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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보다 많은 ETF…투자자들 “무얼 골라야 하나”

다양한 ETF가 쏟아지는 현상은 투자자에게 분명 이점도 있다. 경쟁 심화로 운용 보수가 내려가고, 세제 측면에서도 효율성이 높아진다. 그러나 동시에 ‘선택의 역설’이라는 문제도 발생한다. 미국의 자산관리회사 본파이드웰스의 더글라스 본파스 대표는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선택지가 많다는 것은 좋지만, 어느 순간 부담으로 바뀐다”며 “지나친 선택 옵션은 투자자들의 역량을 강화시키기보다 오히려 마비시킨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제 ETF는 인공지능(AI), 반려동물, 대마초, 친(親)·반(反) 환경·사회·지배구조(ESG) 포트폴리오까지 다 있다”며 “장기 투자를 위한 건지, 아니면 흥미 위주의 선택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라고 꼬집었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스스로 투자 결정을 내리는 ‘셀프 디렉티드 투자자’의 비율은 갈수록 줄고 있다. 미국 시장조사업체 세룰리(Cerulli)에 따르면, 자체적으로 투자 종목을 고르는 투자자는 2009년 41%에서 지난해 25%로 대폭 줄었다. 전문가들은 이런 과열 양상 속에서도 결국 시장에서 살아남는 ETF는 한정적일 것으로 보고 있다. 모닝스타의 고객솔루션 책임자 벤 존슨은 “선택 과부하는 식품점 진열대부터 급증하는 ETF까지 모든 곳에서 나타난다”며 “새로운 시도가 제품 난립을 낳지만, 결국은 지속적으로 매력을 유지할 수 있는 상품만 살아남는다”고 했다.

그래픽=김성규

◇한국도 ETF 급증…일 거래량 1000주 미만 비중 8%

한국 시장 역시 ETF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2010년 말 64개에 불과하던 국내 상장 ETF 수는 올해 들어서만 82개가 추가되는 등 이달 26일 기준 1017개까지 불어났다. 불과 15년 만에 16배 가까이 증가한 것이다. 현재 유가증권시장·코스닥에 상장된 종목 수는 총 2881개로 ETF 숫자는 상장 주식 수의 35%에 달한다.

문제는 ETF 수가 늘어나면서 이른바 ‘좀비 ETF’도 적지 않게 등장했다는 점이다. 올해 하루 평균 거래량이 1000주 미만인 ETF는 74개로 전체의 8%를 차지한다. 지난 5년을 살펴봐도 매년 100개 안팎의 ETF가 하루 1000주 미만으로 거래됐다. 한국거래소의 ETF 상장폐지 기준인 순자산총액 50억원 미만 종목도 50개에 달한다. 이처럼 거래량이 낮거나 순자산총액이 적은 ETF는 사실상 투자자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상태로, 간신히 상장만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유행을 타면 너도나도 비슷한 ETF를 내놓는다”면서 “2021년 메타버스가 유행하면서 관련 ETF가 쏟아졌지만, 결국 시장의 관심이 사라지자 상장폐지되거나 이름과 전략을 바꾼 것이 그 예”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지나치게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는 의견도 나온다. 한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처음에는 소외돼 보이더라도 언제 시장의 주목을 받을지 알 수 없다”며 “자산총액이 낮거나 거래량이 적은 ETF가 투자자에게 주는 피해가 거의 없는데, 이를 이유로 상장폐지하면 오히려 장기 투자자들의 기회를 빼앗는 일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