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홍대에서 공연하던 잔나비 /페포니뮤직

지난 2013년 5월 서울 마포구 홍대입구역 9번 출구 뒷골목. 매주 버스킹을 하던 키 크고 삐쩍 마른 까만 청년들을 사람들은 ‘슬픈 고사리’라고 불렀습니다. 흐느적거리는 몸짓으로 슬픈 노래를 부르는 그들의 모습이 마치 고사리 같았기 때문입니다.

경기 성남시 분당에서 태어난 친구들인 이들은 동네 서현역에서 버스킹을 하다 “우리 노래를 더 많은 이들에게 알리고 싶다”며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러나 낯선 거리, 낯선 사람들 앞에서 낯선 노래를 부르는 건 쉽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닮은 큰 키의 형이 쭈그려 앉아 버스킹 간판에 분필로 안내문을 쓸 때면 왠지 모르게 부끄러웠다고 합니다. 그 간판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밴드 잔나비, 노래가 마음에 드시면 페이스북 ‘좋아요’를 눌러주세요!>

“집에 돌아가면 ‘좋아요’ 개수가 몇 개인지 확인하곤 했어요. ‘좋아요’가 많이 나오는 골목을 찾아다니며 버스킹을 하기도 했지요.”

그룹 사운드 ‘잔나비’의 최정훈은 당시를 회상하며 말했습니다. 이랬던 이들이 이달 초 데뷔 11년 만에 인디 밴드 최초로 국내 대중음악 콘서트계 상징으로 통하는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케이스포돔(옛 체조경기장)에 입성했습니다. 오는 11월에는 대만에서 첫 해외 단독 공연도 갖습니다.

대규모 자본과 인력이 없는 인디 밴드가 자신의 색깔을 유지하며 성장해 세계 무대로 진출하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잔나비는 이 과정에서 우여곡절도 많았습니다. 이들은 어떻게 뚜벅뚜벅 이 길을 걸을 수 있었을까요? 돈이 되는 여기 힙해 70번째 이야기입니다.

인디 밴드 최초로 체조경기장 진출한 잔나비 공연 /페포니뮤직

<1>거리 공연으로 다져진 내공

매일 저녁이면 많은 예술가들이 모여드는 거리.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그때 잔나비의 필살기는 델리스파이스 ‘고백’과 비틀스의 ‘헤이 주드’.

“중2 때까진 늘 첫째 줄에/ 겨우 160이 됐을 무렵/ 쓸 만한 녀석들은 모두 다/ 이미 첫사랑 진행 중.”

익숙한 노래에 발길을 멈춘 사람들은 자작곡들을 들려주자 떠났다고 했습니다. 최정훈은 말했습니다.

“자작곡만 들려주면 사람들이 자리를 떴어요.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었지요.”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노래를 알렸습니다. 클럽FF, 구(舊) 클럽타, 고고스2, 에반스라운지 등 버스킹을 나가지 않을 때는 홍대 클럽 공연을 돌았습니다.

“각 클럽에 데모곡들을 보내드려요. 클럽 사장님들이 들어보시고 마음에 들면 수요일이나 목요일에 테스트 공연을 하게 해주세요. 그렇게 공연을 하다 반응이 좋으면 주말 좋은 시간대로 넘어가죠.”

최정훈의 형인 최정준 페포니뮤직 대표는 “공연 횟수로는 진짜 국내에서 ‘짱’ 먹을 자신이 있다”며 2013년부터 날짜별로 다 파일링한 공연 일정을 보여줬습니다.

이런 많은 공연 경험은 잔나비의 첫 번째 강점입니다. 그들은 거리에서, 그리고 클럽에서, 차곡차곡 내공을 쌓아갔습니다. 누군가는 “잔나비 노래는 음원이 아닌 라이브로 들어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음원으로 듣거나 방송으로 볼 때는 그냥 감미로운 음색을 가진 청년들 같지만, 라이브 공연으로 보면 폭발적인 성량을 가진 밴드이기 때문입니다.

이달 초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잔나비 공연 /페포니뮤직

<2>각종 대회에서 두각

이렇게 내공을 쌓은 잔나비는 두 개의 대회로 대중에게 이름을 알렸습니다. 하나는 2013년 8월에 방영된 ‘수퍼스타 K5’, 다른 하나는 2014년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에서 선정하는 ‘펜타슈퍼루키 챌린지 선정 펜타슈퍼루키’입니다. 한쪽으로는 대중성을, 다른 한쪽으로는 기존 락팬들의 마음을 공략한 것입니다.

이렇게 펜타슈퍼루키로 선정됐던 새내기 밴드는 10년 후인 지난해 펜타포트락페스티벌 마지막 날 헤드라이너로 올랐습니다. 보수적인 국내 락업계지만 헤드라이너에 오른 잔나비에게는 모두 뜨거운 박수를 보냈습니다. ‘슈퍼루키’ 때부터 직접 키운 막내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전설적인 영국 밴드 ‘펄프’ 등이 서는 무대에 올라 자신들의 히트곡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하여’를 불렀습니다.

“나는 읽기 쉬운 마음이야/ 당신도 스윽 훑고 가셔요/ 달랠 길 없는 외로운 마음 있지/ 머물다 가셔요.”

어느 헤드라이너 때보다 더 현장을 가득 채운 관객들은 콘서트처럼 이 곡을 떼창했습니다.

이달 초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잔나비 공연 /페포니뮤직

<3>인디 감성을 지켜라

이렇게 홍대 뒷골목에서 잠실 체조경기장까지 달려온 꿈이 이뤄진 날. 그들은 인디 감성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화려한 특수효과 없이 오로지 목소리와 악기 연주만으로 40곡이 넘는 곡을 3시간 반 동안 라이브로 불렀습니다.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재현한 버스킹 무대였습니다. 12년 전 그때처럼 최정훈은 노란색 셔츠를 입었고, 김도형은 화가 모자를 쓰고 기타를 잡았습니다. 중학교 때 국어학원에서 만나 20년이 넘게 함께한 이들은 노부부 케미를 자랑했습니다. 항상 무던해 보이던 김도형은 “진짜 제가 눈물이 잘 안 나는데 오늘은 말만 하면 눈물이 날 것 같네요”라고 말했습니다. 뭔가 복받친 듯한 그는 기타를 치다 무대에 드러누워 계속 연주를 이어갔고, 최정훈은 그 옆에 누워 절규하듯 노래를 계속했습니다. 최정훈은 손가락으로 무대 한편을 가리키며 “이만한 데서 노래하던 잔나비가 여러분들이 지켜보는 지금 여기, 처음으로 올림픽체조경기장에 섰다”며 감격했습니다.

이달 초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잔나비 공연 /페포니뮤직

그리고 그들은 12년 만에 자작곡이자 데뷔곡 ‘로케트’를 불렀습니다. 홍대 뒷골목에서 부를 땐 다들 떠나갔지만, 이곳에 모인 1만5000명은 모두 따라 불렀습니다.

“그댄 나의 universe 힘찬 나의 로켓트!/ 저 멀리 날 보내줘 love love love love love.”

노래가 행운을 불러온 것일까요? 이들은 오는 11월 9일 대만에서 첫 해외 공연을 가집니다. 올해 말 12월 27~28일에는 서울에서, 내년 1월 3~4일에는 부산에서 앙코르 공연도 가집니다.

그들은 11년 동안 꾀부리지 않고 성실하게 몸으로 하나하나 부딪히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큰 무대와 사람들에 둘러싸여 노래를 부르는 통쾌하고 신기한 상상을 자주 했었는데 그 상상이 현실이 됐다”는 최정훈은 자신의 옆을 늘 지킨 멤버이자 친구인 김도형에게 말했습니다.

“고생이 정말 많았고, 지금처럼 우리 둘이 성실하게 음악을 만들어 나간다면 더 멋진 공연을 만들 수 있을 거라 믿는다. 고생이 많다. 그치만 행복하잖아? 앞으로 더 친하게 지내자. 고맙다!”

이달 초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잔나비 공연 /페포니뮤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