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게요/사사게요/신조-오 사사게요(바쳐라/바쳐라/심장을 바쳐라)”
지난 6일 경기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린 뮤직 페스티벌 ‘워터밤’. 뜨거운 여름밤이 절정을 향해갈 때쯤 DJ 레이든(한석현)이 한 음악을 틀자 관중들은 오른손 주먹을 왼쪽 심장에 올리며 떼창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동작은 일본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에 등장하는 “신조 사사게오!(심장을 바쳐라!)”, 울려 퍼진 음악은 링크드 호라이즌이 부른 오프닝 OST(사운드트랙)입니다.
지난 12일 대전 한화생명볼파크에서 열린 ‘2025 신한 SOL뱅크 KBO 올스타전’. 키움 이주형 선수가 초록색 망토를 두르고 눈 밑에 힘줄 분장을 한 채 등장했습니다. 이 선수가 두른 것은 ‘진격의 거인’ 내 조사병단들이 입는 망토, 눈 밑 힘줄 분장은 거인화의 증거입니다. 이 선수가 주인공 에렌 예거로 분장한 것입니다. 그는 안타를 친 후 에렌이 거인화가 될 때 하는 동작인 손목을 깨물며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습니다.
요즘 진격의 거인을 보지 않고는 인터넷의 밈(유행)도, 20~30대와 대화도 되지 않습니다. 그들 사이에서 ‘진격의 거인’ 열풍이 강하게 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마 하지메의 만화 ‘진격의 거인’은 2009년부터 일본에서 연재된 미지의 거인을 소재로 한 다크 판타지 장르입니다. 2013년부터 TV 애니메이션으로 방영됐습니다. 이렇게 10년도 더 된 일본 애니메이션이 최근 한국 청년들에게 뜨거운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소셜미디어에는 N차 관람 인증, 명대사 모음집이 쉴 새 없이 올라옵니다. 작가 이사야마 하지메의 고향인 ‘일본 히타 여행’도 성지 순례지로 떠올랐습니다. 지난달 고려대 화정체육관에서 열린 ‘진격의 거인 월드 투어 콘서트’는 매회 전석 매진에 힘입어 오는 10월 경희대 평화의 전당에서 추가 공연을 가집니다. 지난 3월 개봉한 극장판은 메가박스 단독 개봉에 비수기라는 단점에도 90만 관객을 달성하기도 했습니다. 한국의 청년들은 왜 10년 전 일본 애니메이션에 푹 빠진 것일까요? 돈이 되는 여기 힙해 64번째 이야기입니다.
<1>탈출구 없는 벽 안의 사회
“처음부터 이 세계는 지옥이야.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먹는, 친절할 정도로 이해하기 쉬운 세계.”
‘진격의 거인’은 미지의 거인을 피해 벽 안에 살고 있는 인류의 삶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 안은 벽으로 계급이 나뉘어 있고, 이 벽은 뛰어넘기 어렵습니다. ‘벽 안의 인류’와 ‘거대한 적’, ‘모르는 진실’이라는 설정은 젊은 세대가 겪는 사회적 폐쇄성, 불확실한 미래, 시스템에 대한 불신과 유사한 정서를 자극합니다. 특히 이들은 취업난, 부동산 불평등, 계층 고착화 등을 겪으며 ‘탈출구 없는 사회’를 체감하고 있기에, 벽 안에 갇혀 있는 인간들의 모습에 깊이 공감합니다. 매일 아침 진격의 거인 음악을 들으며 하루를 시작한다는 김모(27)씨는 “거인을 향한 무력감, 사회를 향한 분노가 지금의 내 삶에서 느끼는 감정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며 “그래도 웅장한 OST를 듣거나, 주인공들이 입체 기동 장치를 달고 날아다니며 거인과 싸울 때 내 가슴도 뜨거워지며 대리 만족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2>방황하며 성장하는 주인공
“우리는 모두 태어났을 때부터 자유다. 그것을 막는 자가 아무리 강해도 상관없다. 불꽃 뭍이든 얼음 대지든 뭐든 좋다. 이 세계에서 최고의 자유를 손에 넣은 자. 그걸 위해서라면 목숨쯤 아깝지 않다. 세계가 아무리 무서워도 상관없다. 세계가 아무리 잔혹해도 상관없다.”
‘진격의 거인’ 속 주인공들은 어리고 미숙합니다. 완벽하지 않고 방황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신념과 목표를 위해서라면 몸을 사리지 않고 달려듭니다. 진격의 거인 속 전투는 속시원하지 않습니다. 어느 전투든 많이 죽고, 많이 다칩니다. 그러나 그런 주변 인물들의 선택과 희생 속에서 주인공들은 입체적인 인간으로 성장합니다. 깨지고 부서지지만, 리더로 성장해 나갑니다.
주인공 에렌도 처음엔 단순한 복수심으로 움직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상과 현실에서 항상 ‘이상’을 선택합니다. 뛰어난 성적을 받았지만 편안한 헌병대 대신 조사병단에 들어갑니다. 이들에게 헌병대는 기득권, 조사병단은 꿈을 이루기 위해 고난을 겪어야 하는 가시밭길과 같습니다. 기득권을 누리는 기성세대에 대한 반감을 대신 극중 인물들을 통해 대신 표출합니다.
<3>진짜 좋은 어른은 믿고 맡겨주는 사람
“애초에 태어난 것조차 의미가 없었던 것인가? 죽어간 동료들도 그러한가? 그 병사들도 전부 무의미했단 말인가? 아니 그렇지 않다. 그 병사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들이다.”
진격의 거인에서 어른들의 이미지는 대부분 좋지 않습니다. 약한 아이들을 좋아주는 건 약한 아이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어른들에게 존경의 눈빛을 보내는 순간은 지켜줄 때가 아닌 믿고 맡겨 줄 때입니다. “너의 판단이니깐.” 이 말에 그들은 감동 받습니다.
이는 ‘네가 뭘 알아?’라는 말 속에서 아직도 사회적 자리를 찾지 못한 청년들의 마음을 자극합니다. 이들은 자신도 몰랐던 재능을 찾아주고, 큰 임무를 맡겨줄 때, 무한한 충성심을 표하며 목숨 걸고 완수합니다. 그들이 거인과 싸우면서 바라는 것은 안락한 삶과 미래가 아닌 사회에서 내가 가지는 존재의 의미입니다.
지금 한국 청년들이 진심으로 원하는 것도 바로 이런 부분들이 아니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