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증권사들이 원했던 ‘법인 지급결제’가 잠정 유보됐다. 여기서 법인 지급결제란 고객의 이체 지시를 받으면 증권사가 직접 송금하는 것을 뜻한다. 지금은 이 방법이 막혀 있어 증권사 고객 기업이 직원의 월급을 주거나 거래처에 대금을 결제하려면 증권사는 연계 은행을 통해야 한다.
증권가에서는 기업 고객의 편의성을 제고하기 위해 규제가 완화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데, 한국은행이 사실상 반대하면서 당장 시행은 어려울 전망이다. 한국은행은 결제의 안정성을 높이기 위한 장치들이 더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17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증권가에선 금융투자협회를 중심으로 법인 지급결제를 허용해 달라는 입장을 여러 차례 밝혔지만 한국은행은 요지부동이다. 지난달 김병환 금융위원장이 국회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 출석해 “(증권사 법인 지급결제는) 한국은행과 완전히 합의된 상황이 아니다”라고 상황을 설명한 바 있는데, 여기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한 모양새다.
증권사의 법인 지급결제는 법인 고객의 편익과 연결돼 있다. 법인은 통상 여유 자금을 단기금융상품인 머니마켓트러스트(MMT)나 환매조건부채권(RP)으로 굴린다. 증권 계좌에서 금융투자상품을 운용하다가 직원 월급을 지급하거나 거래처에 판매대금을 보내려면 은행 계좌를 한 번 거쳐야 한다. 하지만 증권사 법인 지급결제가 허용되면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된다.
퇴직연금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미국 법인에서 한국 법인으로 직원의 퇴직금을 보내주려면 미국 법인이 특정 증권사를 써도 우리나라에 들어오려면 연계 은행 계좌를 써야 한다”며 “미국 법인 입장에선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한국은행이 우려하는 지점은 증권사 지급결제시스템의 구조를 보면 알 수 있다. 개인 투자자 A씨가 자신의 주식 통장에서 자신의 또 다른 계좌나 타인의 계좌로 송금하면 실시간으로 잔액에 반영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이런 거래를 한국은행이 모두 모아 다음 날 금융사 간 차액을 통보하고, 이때 청산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즉 한국은행이 걱정하는 건 증권사가 거래 다음 날 있을 청산을 감당하지 못해 불이행을 선언하는 것이다.
법인 지급결제와 달리 증권사가 개인 지급결제를 할 수 있는 건 은행과 계약을 맺은 덕이다. 대금을 청산하는 과정에서 증권사가 직접 개입하지 않는다. 대신 증권사는 대형 은행과 결제 대행에 대한 계약을 맺는다. 증권사가 고객에게 송금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대형 은행을 경유해 청산에 간접적으로 참여하는 식이다.
이때 대형 은행은 증권사와의 협의를 통해 순이체한도를 설정한다. 순이체한도란 증권사가 결제불이행을 선언할 경우를 대비해 은행이 증권사를 보증하는 금액인데, 은행은 그 대가로 증권사로부터 담보를 받는다. 담보는 주로 증권사가 한국증권금융에 맡긴 투자자 예탁금에 대한 신탁수익권으로, 그 규모는 순이체한도의 100%다. 대형 증권사의 순이체한도는 약 3000억원이다.
현재는 개인 지급결제만 가능해 청산할 금액이 크지 않지만 법인 지급결제까지 허용되면 금액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란 게 한국은행의 우려다. 현행 순이체한도만으로는 지급불능 사태를 예방할 수 없다는 뜻이다. 또 증권사와 은행은 다르다는 점도 고려했다. 은행은 예금 가운데 일부를 한국은행에 예치한다. 이를 지급준비금이라고 하는데, 증권사는 이런 제도를 적용받지 않는다.
금융투자업계는 법인 지급결제를 위해 순이체한도를 늘릴 수 있다고 하지만 어느 수준이 적절한지를 두고도 금투업계와 한은 간 이견이 오갈 것으로 보인다. 업계가 충분하다고 보는 규모도 한은 입장에선 탐탁지 않을 수 있어서다. 이 탓에 2016년 황영기 금융투자협회장이 밀어붙이던 증권사 법인 지급결제를 지난해 서유석 금투협회장이 이어받았으나 실행까지는 쉽지 않아 보인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결제가 중단되면 안 되기 때문에 (중앙은행으로서는) 여러 리스크를 감안해야 한다”며 “추가적인 순이체한도가 얼마가 될지, 추가 한도에 대한 담보를 어떻게 설정할지 등 구체적인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