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 디폴트 옵션(사전 지정 운용 제도)이 원금이 보장되는 초(超)저위험 상품에만 집중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초저위험 디폴트 옵션 상품은 은행 예금과 같이 원금이 보장되지만 금리는 정기예금 수준이다. 이에 ‘잠자는 퇴직연금을 깨우자’는 도입 취지가 무색해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디폴트 옵션은 가입 근로자가 운용을 책임지는 확정기여(DC)형 퇴직연금이나 개인형 퇴직연금(IRP)에서 별다른 운용 지시를 내리지 않더라도 미리 지정한 상품으로 적립금이 자동 투자되도록 하는 제도다. 은행 정기예금에 잠겨 있는 퇴직연금의 수익률을 높이기 위해 작년 7월 시범 도입됐고, 지난달 12일부터 디폴트 옵션 지정이 의무화됐다.
21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 6월 말 기준 전체 퇴직연금 디폴트 옵션 적립금은 1조1019억원이다. 이 중 9393억원(85%)이 원금이 보장되는 초저위험 상품에 몰린 것으로 집계됐다. 이 통계는 비교적 투자 관심도가 높은 가입자들이 시범 기간 선택한 상품들을 공시한 것이다. 업계에선 지난달 디폴트 옵션이 본격 도입된 후 원금 보장형 초저위험 상품을 선택한 가입자 비율이 더 높아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 증권 업계에선 디폴트 옵션이 도입되면 높은 수익률을 노리고 증권사 상품에 적립금을 투자하도록 지정하는 가입자가 많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실제로는 주로 초저위험 상품을 내놓은 KB국민, 신한, 우리, 하나, NH농협은행 등 5대 은행에 전체 적립금의 90% 가까이가 쏠렸다.
디폴트 옵션 시대에 관심을 끌 것이라고 주목됐던 타깃데이트펀드(TDF) 성적은 처참했다. TDF는 은퇴 시점을 정해놓고 초기에는 고수익 위험 자산에 투자하다가 퇴직 시점이 가까워지면 안전 자산으로 옮겨 운용한다. 지난 6월 말 기준 디폴트 옵션 상품 총 223건 중 21건(9.4%)이 TDF일 정도로 금융사들은 관련 상품을 적극 선보였다. 그러나 실제 적립금을 보면 전체의 0.5% 수준에 불과한 56억6245만원이 모이는 데 그쳤다.
어떤 디폴트 옵션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수익률 격차는 벌어졌다. 초저위험 상품은 가장 높은 수익률이 6개월에 2.6% 수준이었다. 반면 고위험 상품은 원금을 보장하지는 않지만 올해 증시 회복에 힘입어 6개월간 14%까지 수익이 났다.
이지은 한화생명 FA(파이낸셜 어드바이저)는 “아직까진 노후를 대비하는 퇴직연금은 원금을 지켜야 한다는 인식이 강해 적극적 투자에 나서는 경우가 많지 않다”며 “그나마 최근 고금리 상황에서 원금 보장형 상품 수익률이 나쁘지 않았지만, 저금리 시대가 오면 수익률이 더 떨어질 수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고 했다.
미국이나 호주 같은 ‘연금 선진국’은 퇴직연금 중 펀드 등 실적 배당형 상품 비율이 60~70%다. 일시적으로 원금 손실이 있을 수 있지만 장기 투자하면 연 8%대 높은 수익률을 기대할 수 있다. 노후에 받을 수 있는 자금도 당연히 늘어난다. 다만, 약세장에서는 원금 손실까지 감수할 각오를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