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증(치매)인 부모님 간병을 내가 다 도맡아 해왔다, 그러니 재산을 더 많이 상속받을 권리가 있다.”

노인 대국 일본에선 인지증을 앓고 있는 부모 간병을 둘러싼 형제·자매간 갈등이 큰 사회 문제다. 상속 분쟁 발생 원인 중 1위를 차지할 정도다. 19일 일본 미쓰이스미토모신탁은행에 따르면, 600만명에 달하는 일본의 인지증 환자들이 보유한 자산 총액은 지난 2020년 기준 250조엔(2450조원)에 달했다. 2020년 기준 일본 국내총생산(GDP)이 540조엔이었는데, 거의 절반 수준이다. 한국의 인지증 환자 수는 일본보다는 훨씬 적은 84만명 수준이지만, 역시 고령화 추이에 따라 빠른 속도로 늘고 있다.

인지증은 완치가 어렵고, 인생의 마지막을 비참하게 마치게 해서 암과 함께 가장 두려운 병으로 알려져 있다. 인지증 부모를 돌보는 것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매우 고된 일임은 틀림 없다. ‘긴 병에 효자는 돈이다’라는 말이 괜히 나오지 않는다.

상속·증여 전문가인 타치바나 케이타(橘慶太) 세무사는 “일본은 인지증 환자가 급증하면서 상속 관련 분쟁도 크게 늘었다”면서 “돌봄 부담이 컸던 자녀는 (부모 사후에) 재산을 더 많이 물려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법적으로는 그런 노력을 대부분 인정받지 못한다”고 말했다.

몸이 불편한 부모 통장에서 발생한 현금 인출에 대해서도 가족끼리 다투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부모와 동거하지 않은 상속인이 “생활비나 의료비라고 하기엔 통장에서 빼서 쓴 금액이 너무 많지 않느냐”면서 의심한다는 것이다. 반면 부모를 돌본 상속인은 “간병은 나한테 전부 맡겨 놓고선 이제 와서 왜 딴소리냐”면서 맞서는 게 보통이다.

형제 자매가 상속재산을 두고 분쟁을 벌이는 일이 늘고 있다. 지난해 전국 가정법원에 접수된 상속재산 분할 심판 청구 건수는 2380건으로 역대 최대치였다. 상속재산 분할 심판은 피상속인(사망한 사람)의 남은 재산을 법원을 통해 나누는 것이다./일러스트=이연주 조선디자인랩 기자

타치바나 세무사는 “노부모의 통장 관리를 맡게 되는 자녀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면서 “영수증을 전부 모아두지 않았다면, 나중에 사용처를 명확하게 알기 힘들어 가족 분쟁의 씨앗이 된다”고 말했다. 가령 자녀교육이나 대출상환 등이 끝난 70~80대 고령자가 연간 1000만엔(약 1억원) 이상을 생활비로 썼다고 하면,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다.

부모 통장 관리 때문에 의심을 받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일본에선 장부 작성을 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 日 치매노인 재산이 GDP 절반인 2450조원... 줄잇는 상속 분쟁

“(부모 통장에서) 횡령하지 않았는데도 다른 형제 자매들에게 의심을 받기도 합니다. 이런 불편한 상황을 피하고 싶다면, 장부를 작성하면 됩니다. 부모 통장 관리를 맡게 됐다면, 현금을 언제 얼마씩 인출해서 어디에 썼다는 식으로 간단히 써두는 겁니다. 아주 짧은 기록일지라도 나중에 횡령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증하기엔 충분합니다.”

그는 이어 “명절 때 가족이 모일 때마다 부모님 통장은 이런 식으로 기록해서 관리하고 있다고 공개하면 다른 상속인들도 안심하고 고맙게 생각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인지증으로 인한 자산동결 대책으로 이용되는 일본의 가족신탁 이용자수는 꾸준히 늘고 있다. 토지 신탁 등기 건수는 가족신탁 추이를 살피는 용도로 이용되는데, 지난해 1만2805건으로, 2017년(7054건)과 비교하면 71% 늘었다./일본 법무성

한국에서도 가정법원에 접수되는 상속 관련 분쟁은 매년 늘어나고 있다. 19일 법원행정처에 따르면, 지난해 상속재산 분할심판 청구는 2380건으로 역대 최고치였다. 형제·자매가 상속 재산을 놓고 다투고 의절하는 일은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가온 법무법인의 배정식 패밀리오피스센터 본부장은 “간병 등 특수한 상황에 처해 있어서 법정 상속분대로 일률적으로 상속받는 것은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자녀들이 주로 상담을 요청한다”면서 “미국에 있는 오빠가 한국에는 찾아 오지도 않으면서 병든 모친의 건물과 통장 걱정만 해서 서운하다는 여동생도 있었다”고 말했다.

“자녀 입장에선 그 동안 받은 것도 중요하지만 상속 개시 시점에 남아 있는 재산도 중요하지요. 그래서 서로 받지 못한 부분에 대해 충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나라의 65세 이상 인지증 추정 환자 수는 약 84만명. 2040년에 217만명에 달하고 2050년에는 300만명이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2021 대한민국 치매현황 보고서

몸이 불편한 부모를 간병한 자녀가 당연히 재산을 더 많이 물려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법적으로는 꼭 그렇진 않다. 배정식 본부장은 “상속인들이 서로 합의해서 (부모를 돌본 자녀에게) 기여한 만큼의 재산을 별도 상속분(기여분)으로 인정해 줄 수는 있다”면서 “하지만 기여분을 얼마로 해야 하는지 상속인들끼리 의견 충돌이 생기면, 결국 법정에 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분쟁을 막기 위한 방법으로 배 본부장은 선진국에선 대중화되어 있는 ‘치매안심신탁’을 소개했다. 치매안심신탁은 평소에는 예금이나 채권 같이 안전한 금융상품으로 운용되다가 남에게 부양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되면 금융회사가 비용 처리를 진행하는 상품이다. 단 치매안심신탁은 재산 소유자의 건강 상태가 정상일 때만 계약이 이뤄질 수 있다.

배 본부장은 “치매안심신탁을 하려는 소유자는 대개 고령인데, 단 몇 개월 사이에 건강상태가 급격히 나빠지거나 의사 소통이 어려워져서 계약이 불발되기도 한다”면서 “불의의 사고에 대비하기 위해 미리 보험에 가입하듯, 선진국 고령자들은 아름다운 노후를 위해 치매안심신탁을 준비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