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받는다, 안타깝다, 아쉽다, 속상하다...
요즘 유튜브 증권방송을 틀고 국내 증시 시황을 듣고 있으면 온통 이런 어두운 말들 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연말 코스피가 좀처럼 3000선에 안착하지 못하고 부진한 흐름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돈 버는 재미가 줄어들자, 개미들은 이달 들어서만 8조5000억원 넘는 국내 주식을 순매도했다. 개미들이 돈을 빼내면서 이달 코스피 하루 평균 거래대금도 10조원이 붕괴됐다. 28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이달 코스피 일 평균 거래대금은 9조5857억원으로, 작년 2월 이후 최저치로 떨어졌다(최고치는 지난 1월 26조원대였다).
청와대는 고꾸라진 한국 증시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 1년 전과는 딴판이다. 당시 문재인 대통령은 개인 투자자, 이른바 ‘동학개미’들을 격려하며 자축했었다.
문 대통령은 작년 12월 국무회의에서 “의미 있는 것은 개인 투자자들이 주식 시장을 떠받치는 힘이 됐다는 점”이라면서 “어려운 여건 속에서 외국인과 기관이 주식을 팔고 나갈 때 개인 투자자들이 동학개미 운동에 나서며 우리 증시를 지키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우리 경제의 회복과 성장에 대한 믿음이 주식시장에 나타나고 있다고 설명했었다.
청와대는 침묵하고 오히려 대선 후보들이 나서서 망가진 한국 증시를 살리겠다며 온갖 공약을 쏟아내는 사이, 대만은 주가가 사상 최고치를 찍으면서 승승장구하고 있다. 28일 오후 2시 10분 현재 대만 자취안지수는 전날보다 0.7% 오른 1만8185.14를 기록하고 있다. 장중 한때는 0.82% 올라 1만8197.36까지 찍었다.
차이잉원 대만 총통이 올해 (대만) 경제 성장률이 11년 만에 최고인 6% 이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힌 것이 영향을 미쳤다. 차이잉원 총통은 상승 행진 중인 대만 증시에 대해 언급하며 “대만 주식시장이 1만7000선 이상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은 대만 경제의 기본이 매우 좋고 강함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때 아시아 4룡(龍)으로 불리면서 쌍둥이 경제라고 했던 한국과 대만. 하지만 왜 4룡 중에서 대만만 포효(咆哮)하고 있는 걸까. 한국 증시는 무슨 이유로 이렇게 부진한 것일까.
김기주 KPI투자자문 대표는 “한국 정부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데, 비록 불가피한 전략이긴 하지만 이러한 한국 경제의 중국에 대한 의존도가 현재 증시에 큰 부담이 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중국 비중을 줄이면서 기계적으로 한국 시장에서 돈을 빼고 있다는 것이다. 미·일·대만의 3각 경제 동맹은 계속 강해지고 있는데, 한국은 중국을 버리지 못해 고립되어 간다는 것이 김 대표 분석이다.
“대만의 차이잉원 정부는 반중·친미 노선을 명확히 하고 있죠. 최근 미국산 돼지고기 수입 국민투표는 단순한 돼지고기 수입 문제를 넘어 미국과의 경제 협력을 강화하고 중국 의존도를 낮추는 것을 의미했는데, 차이잉원 정부가 국민투표에서 이기면서 정치적 안정감을 강하게 줬습니다. 코로나 상황에 성공적으로 대응한 점이나 올해 대만 경제성장률이 6%로 11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할 것이란 기대감도 증시 호조에 영향을 줬죠.”
김 대표는 “대만 증시의 대장주인 TSMC는 전세계 반도체 파운드리(반도체 수탁 생산)의 60% 이상을 점유하고, 매출 60% 이상이 대미 수출용”이라며 “TSMC는 미·일·대만 결속의 핵심이자 상징”이라고 말했다.
대만 증시에 훈풍을 불어넣는 것은 고성장이 기대되는 신흥국에서 투자 기회를 찾는 외국인 투자자들이다. 대만은 ‘하이테크 아일랜드(첨단 기술의 섬)’로 불릴 정도로 우수한 기술력을 갖춘 기업들이 많다.
또 대만은 중소기업 위주의 내실 성장에 치중해 글로벌 기업의 공급 사슬에 편입되는 부품 산업에 주력해온 반면, 한국은 대기업 중심의 발전 전략을 채택하고 글로벌 기업들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박진환 파인만자산운용 대표는 “대만 증시의 대장주인 TSMC는 삼성전자와 똑같은 반도체 업종이지만 주문자 의뢰 방식이라서 실적 변동성이 크지 않고 오더가 꾸준하다”면서 “주요 고객들로 미국 빅테크 기업들이 포진해 있고 그들과의 협업도 원활해 경쟁력이 높다”고 말했다.
전종규 삼성증권 수석연구위원도 “대만 경제는 중국 본토 경기와 미국 글로벌 기업 실적과 밀접한 관계로 내년에도 신흥국 투자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할 것”이라며 “중국 본토는 경기둔화와 미중 분쟁 이슈가 걸림돌이지만 대만은 중국 내수 확대 수혜뿐만 아니라 미국의 대중국 견제에 따른 미중 분쟁의 수혜주로 부각될 것”이라고 말했다.
환율과 배당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다. 민병규 유안타증권 연구원은 “한국과 대만 증시의 차이를 크게 벌린 변수는 환율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민 연구원은 “올해 한국 원화 가치는 9% 절하된 반면, 대만은 오히려 1% 절상됐다”면서 “외국인 투자자 입장에선 같은 돈이면 환율로 수익을 더 낼 수 있는 대만 증시를 선호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연말 배당 기대감도 격차를 벌리는 요소다. 대만은 주식 배당 수익률이 최근 10년 평균 연 4.2%에 달해, 전세계 최상위권이다. 한국은 주요 기업들이 배당을 늘리고는 있지만, 코스피 기준 예상 배당수익률은 1.8% 수준에 머물러 대만과 비교하면 상대적인 매력은 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