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코드(decode): 부호화된 데이터를 알기 쉽도록 풀어내는 것. 흩어져 있는 뉴스를 모아 세상 흐름의 안쪽을 연결해 봅니다.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에게 관심 갖게 된 것은 일본 애니메이션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 때문이었습니다. 미야자키 감독이 한 인터뷰에서 ‘강대국 사이에 끼인 나라의 이상적 지도자’로 야루젤스키를 꼽았었거든요.

야루젤스키는 폴란드의 첫 대통령(1989~1990년)이자 폴란드 공산정권의 마지막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공산당 제1서기로 있던 1981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레흐 바웬사가 이끌던 ‘자유연대노조’를 탄압하는 등 폴란드의 민주화 운동을 억압했죠. 조선소 노동자 출신인 바웬사는 동서(東西)냉전 중이던 1980년대에 동유럽 최초의 합법 노조인 자유연대노조를 조직했습니다. 당시 사회주의 체제였던 폴란드에서 민주주의 노동운동을 이끌며 동유럽 민주화의 초석(礎石)을 세웠고 1983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1990년 폴란드 대통령이 됐지만 1995년 재선에 실패한 뒤 정계에서 은퇴했죠.

16일(현지 시각)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키예프)의 한 아파트가 러시아군의 포격을 당한 뒤 한 여성이 아이를 데리고 황급히 피신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1980년대 폴란드 야루젤스키의 사례... ‘강대국 사이에 끼인 나라의 이상적인 지도자’는 어떤 사람일지, 역사와 지정학 관계 잘 살펴 판단해야

그런데 미야자키는 야루젤스키가 자유연대노조를 탄압하면서도 사망자를 내지 않았다는데 주목했습니다. 사고로 한 명 죽긴 했지만, 탄압에 의한 유혈참사는 없었다는 거죠. 그러면서 소련에는 ‘(연대노조를) 확실히 진압하겠다’는 태도를 보여 소련의 개입을 막았다는 겁니다. 즉 야루젤스키가 연대노조를 억제하는 척하면서 실은 소련의 개입을 억제했다는 것입니다. 미야자키는 야루젤스키가 그렇게 했기 때문에 폴란드 민주화가 진전됐고, 1990년 바웬사가 초대(初代) 직선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고 해석합니다.

1980년대 야루젤스키에 대한 미야자키 감독의 평가는 현재의 국제정치에도 시사점을 줍니다. ‘강대국 사이에 끼인 나라의 이상적인 지도자’는 어떠해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난관을 헤치고 나라를 번영으로 이끌 것인가에 대한 것 말입니다.

전 세계에 충격을 준 우크라이나 사태를 우선 들 수 있겠죠. 우크라이나를 무력 침공한 러시아 푸틴에 대해선 아무리 비판해도 충분치 않을 겁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용납할 수 없는 일, 일어나선 안 될 일이 결국 일어났고, 이 끔찍한 재난으로 우크라이나의 수많은 국민이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보고 있다는 것이죠.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3주가 넘어가는 상황에서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포기와 군사적 중립 선언, 우크라이나 영토 내에 외국 군사 기지나 무기 배치 불가 등을 조건으로 러시아군이 지난달 24일 침공 이후 점령한 지역에서 모두 철수하고 우크라이나의 안전을 보장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고 합니다.

협상이 잘된다면 이 끔찍한 재난이 어떻게든 해결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유사 시 물리적으로 자국을 지키는 것은 자국민밖에 없음을, 전쟁 시에 타국이 지원에 나서는 정도는 결국 그 나라의 핵심이익에 따르기 마련이란 것을, 냉혹한 국제정치 현실이 보여주고 있죠.

우크라이나 사태가 세계 강대국의 격전지인 동아시아 특히 대만 사례에 시사점을 주는 것은 분명합니다. 사실 한국도 마찬가지겠죠.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라고는 하지만, 둘러싸인 나라들을 보면 ‘강대국 사이에 끼인 나라’임에 분명하니까요.

대만 신주 지역에 위치한 세계 1위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업체) TSMC의 생산공장 전경. /TSMC

◇올해 투자가들의 가장 큰 우려 중 하나는 대만 문제로 대표되는 반도체 지정학 리스크

대만 얘기에 좀 더 집중해 보겠습니다. 우크라이나 사태보다 훨씬 더 큰 지정학적 리스크가 양안(兩岸, 중국·대만) 문제에 담겨 있으니까요.

우선 대만 관련 뉴스입니다. 지난달 24일 대만의 파운드리(반도체수탁생산전문회사)인 UMC는 50억 달러(약 6조원)를 들여 싱가포르에 신공장(12인치 팹)을 짓는다고 발표했습니다. UMC는 작년 4분기 매출 기준 세계시장 점유율이 7%로, 같은 대만의 TSMC(52.1%), 한국 삼성전자 파운드리 부문(18.3%)에 이어 세계 3위 파운드리입니다.

그런데 대만의 한 주간지는 UMC가 20년 만에 싱가포르 투자 확대를 결정한 배경에 대해 “중국이 대만에 압력을 강화하는 가운데 ‘오늘의 우크라이나는 내일의 대만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포함됐다”고 분석했습니다. 이 잡지는 TSMC와 UMC는 삼성전자·인텔보다 지정학적 리스크의 회피를 더 많이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UMC가 싱가포르를 선택한 것은 이 나라가 정치적으로 중립이고 정세가 안정돼 있다는 것, 미·중 기술기업의 동남아 진출 전초기지가 되고 있다는 것, 싱가포르 정부가 자국을 아시아 테크 센터를 만들려고 투자 기업을 적극 지원한다는 것 등의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썼습니다.

실제로 세계 투자자들이 우려하는 올해 최대 리스크 중 하나는 대만을 둘러싼 격렬한 미·중 갈등 등의 지정학 리스크입니다. 높은 인플레이션, 미국의 중앙은행 격인 연방준비제도의 빠른 금리 인상 움직임, 3년째 계속되는 팬데믹 등도 우려되겠지만, 한 외국계은행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가장 많은 투자자들이 꼽은 리스크가 대만 문제였습니다.

최근 미국이 작년 출범한 오커스(AUKUS, 호주·영국·미국 등 3개국의 외교안보 협의체)를 통해 호주에 원자력 잠수함을 제공키로 한 뉴스가 있었죠. 호주가 디젤 잠수함이 아닌 원자력 잠수함을 갖는다는 것은 중국견제 군사전략에서 엄청난 효과를 냅니다.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디젤 잠수함은 항행기간이 12일로 한정돼 경비·전투 능력이 호주 연안에 한정되지만, 원자력 잠수함은 거의 무기한 항행이 가능하며 항행속도도 빠르고, 필리핀 제도를 잠항하면서 중국 본토로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하는 것도 가능해집니다.

오커스, 쿼드(미국·일본·호주·인도 등 4개국의 안보 협의체) 등으로 대표되듯, 미국이 최근 대중국 안보를 강화하는 핵심 이유로는 대만 보호를 꼽을 수 있을 겁니다. 미국이 기술 패권을 확립하고 중국을 억제하려는 가운데, 반도체 분야가 지정학적 대립의 치열한 전쟁터가 되고 있는데요. 미·중 반도체 전쟁의 급소가 바로 대만이죠.

미국은 반도체 설계와 소프트웨어는 물론이고 소재·장비도 최강국입니다. 소재·장비의 경우 특정 분야는 일본·유럽이 강합니다만, 원천기술의 폭과 깊이에서는 미국이 최고죠. 다만 반도체 생산, 특히 첨단 반도체 생산의 대부분을 대만 TSMC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 큰 리스크였습니다. 대만은 지리적으로 중국에 너무 가깝고, 또 중국이 흡수통일을 노리고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죠.

그뿐 아니라 TSMC는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꺾거나 적어도 지연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중국은 반도체의 설계·소프트웨어가 강한 반면, 첨단반도체를 자체 생산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 역시 TSMC 등에 첨단제품 생산을 의존해야만 하는 형편이니까요. 미국은 TSMC가 중국 화웨이 등과 거래하지 못하도록 하는 대신, 미국 기업의 TSMC 물량을 사실상 확보해 줬습니다. 결국 TSMC는 잃은 것보다 더 많은 고객을 얻었고, 팬데믹 이후 반도체 특수까지 겹치면서 사상최대 실적을 경신해나가고 있습니다.

인텔이 15일(현지시각) 유럽 투자 계획을 밝히고 있다. /인텔 행사 캡처

◇미국 정부의 ‘인텔 파운드리 구하기’가 거세지만, 궁극적으로 대만과 한국의 생산능력을 얼마나 빼앗을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하지만 미국의 전략은 여기서 끝나지 않죠. 파운드리 세계 1위인 TSMC, 2위인 삼성전자. 즉 세계에서 7나노 이하 첨단 미세공정을 구사할 수 있는 단 두 회사를 압박해 각각 미국 애리조나와 텍사스에 대규모 파운드리 공장을 새로 혹은 추가로 짓게 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세계최대 CPU 회사이자 IDM(반도체 설계·생산을 함께 하는 종합 반도체 회사)인 인텔이 파운드리 부문의 경쟁력을 강화하도록 부추기고 있지요.

미국의 반도체 제조능력 점유율은 1990년에 37%였지만, 2020년엔 12%로 크게 떨어졌습니다. 중국은 2030년에는 세계 최대 제조 거점이 될 것으로 예상되면서, 미국의 위기감이 커졌고, 이 때문에 중국에 의존하지 않고 또 중국의 안보 위협에서 안전한 반도체 생산망을 구축하겠다는 게 미국의 전략입니다.

인텔은 지난 15일에 독일에 최신 반도체 공장을 건설한다고 발표했는데요. 인텔의 팻 갤싱어(Pat Gelsinger) CEO는 “현재 반도체 제조의 80%는 아시아에서 진행되고 있지만, 인텔은 미국·유럽 투자로 아시아 의존도를 낮추고 ‘밸런스와 탄력성이 더 뛰어난’ 공급망을 만들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인텔의 전략은 유럽이 2030 년까지 세계 반도체 생산의 20%(지금의 2배)를 유럽이 맡도록 하겠다는 전략과 궤를 같이하는 것입니다.

즉 미국 정부는 첨단 반도체 생산을 독점하다시피 하는 TSMC가 있는 대만을 중국으로부터 보호하고, 그러면서 TSMC와 삼성전자를 압박해 미국 회사의 반도체를 미국 내에서 생산할 수 있도록 미국에 공장을 더 짓게 하고, 자국기업 인텔한테 미국에 첨단 반도체 공장을 짓도록 압박·지원하는 동시에, TSMC·삼성전자가 미국의 압박에 대응하느라 정신없는 사이에 인텔이 유럽과 연합해 유럽 내 반도체 생산력 증강의 역할을 맡도록 큰 그림을 그렸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만 보면 모든 게 미국 논리대로 움직일 것 같기도 합니다만, 반드시 성공을 거둔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우선 미국이 인텔을 TSMC·삼성전자처럼 최첨단 공정의 반도체를 양산하는 파운드리 강자로 만들 수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지금은 미국이 경쟁력 강화법안, 반도체 지원법안 등을 필두로 천문학적 지원을 준비하고 있지만, 그런 국가 지원책이 끝까지 지속되고 그래서 지원받은 해당 기업이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전 세계 주요 반도체 서플라이어들의 움직임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상당수는 TSMC·삼성전자·인텔이 각각 100조원 이상을 쏟아부어 파운드리 투자에 나서는 것을 걱정스럽게 바라봅니다. 지금은 미국 입장에서의 지정학적 리스크 해소, 반도체 공급부족 해결 등을 이유로 이런 투자가 당연해 보이기도 하지만, 결국엔 과잉투자 혹은 비용문제, 혹은 반도체 소재·부품 공급이 이들 3개 업체의 발주를 따라가지 못할 가능성, 궁극적으로는 가격경쟁력 등에 따라 승패가 엇갈릴 수도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TSMC는 TSMC대로, 삼성은 삼성대로, 인텔은 인텔대로 전부 ‘나를 따르라’는 입장이지만, 한정된 자원을 효과적으로 써야 살아남을 수 있는 서플라이어 입장에서 누구를 믿어야 할지, 어느 정부를 믿어야 할지, 미·중 패권전쟁의 장기적 판세가 어떻게 흘러갈지에 대해 ‘고차원 방정식’을 풀어야 하는 곤혹스러운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이죠.

지난해 11월 대만 자이의 공군기지를 방문해 F-16 전투기 조종석에 탑승한 차이잉원 대만 총통. photo AP·뉴시스

◇미국의 중국 봉쇄, 대만 보호 전략이 성공할 수도 있지만, 중국의 장기전략과 대만 내 정치 상황 변화에 따라 어려운 게임 될 수도

그럼 대만의 입장은 어떨까요?

대만 정부가 TSMC라는 극강의 패를 미국에 전부 열어 보이려 할까요? 예를 들어 TSMC가 미국 반도체기업의 수탁생산을 전량 미국에서 소화할 수 있도록 하고, 또 관련 공급망 전체를 미국으로 이전했다고 생각해보죠. 그러면 미국이 대만을 지금처럼 호주에 원자력 잠수함까지 지원해가며 보호하려 들까요?

대만 정부의 딜레마일 겁니다. 대만을 흡수통일하려는 중국으로부터 안전을 보장받으려면, 미국에 적극 협력해야죠. 그래서 TSMC가 미국에 대규모 공장을 짓는 겁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미국에 내는 보험료의 성격이 크다고 봐야 할겁니다. 반도체는 작고 가볍기 때문에 국제적 물류에 큰 부담이 없습니다. 급하면 항공수송으로도 얼마든지 충분한 양을 빠르게 공급할 수 있죠. 반면 첨단 반도체의 양산 경쟁력을 확보하려면, 시설을 집약하고 규모의 경제를 만드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업계에 따르면 TSMC가 애리조나에 신공장을 짓는 데 드는 비용은 TSMC가 대만에 같은 공장을 짓는 것에 비해 2.5~3배 더 듭니다. 추가비용 중 일부는 미국 정부가 댄다는 것이지만, 그렇다 해도 TSMC로서는 대만 정부를 대표해 대만의 안전을 보장받는 대가로 미국의 뜻에 따라 공장을 짓는 것이죠.

그렇다고 TSMC가 자사의 최신 기술을 총동원한 공장을 미국에 짓느냐 하면, 꼭 그런 것도 아닙니다. TSMC 미국 공장은 일단 5나노 공정이 들어갈 예정인데요. 이 공장이 본격가동되는 것은 2024년 이후입니다. 현재 TSMC는 4나노 공정으로 양산중이고, 연내 3나노, 내년 이후 2나노를 계획하고 있죠. 따라서 2024년 이후의 5나노 공정이라면 첨단이라고도 할 수 없을 겁니다.

이외에도 TSMC는 일본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과 소니·덴소의 공동출자를 받아 일본 구마모토에도 새 공장을 지을 예정인데요. 이 공장은 28나노 공정으로, 첨단과는 거리가 멉니다. 물론 28나노가 수요가 많고 전략적으로 적합한 것이라고는 해도, TSMC의 첨단 핵심 시설인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 TSMC의 속마음은 “미국의 압박으로 미국에 공장을 짓기는 하지만, 최첨단만큼은 대만에 남겨두고 싶다”일 것입니다. 하지만 미국은 계속해서 TSMC와 대만 정부를 압박하겠죠. “더 첨단으로 지어라”라고요.

이를 두고 미국과 대만 사이에 끊임없이 밀당이 오가고 있을 겁니다. 미국은 대만에 ‘중국으로부터 보호해줄 테니, 가진 것 더 내놔라’일 수 있고요. 대만은 “미국으로 다 옮기면, 나중에 우리가 어떻게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나, 그리고 비용은 누가 다 감당하나”라는 속내일 수도 있겠죠.

그래서 외신을 보면, TSMC가 미국 공장에도 3나노, 2나노 도입을 검토 중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죠. TSMC는 파운드리 업계의 세계최대 민간기업인 동시에 미국·대만, 미국·중국 간의 대전략하에서 고도의 수 싸움을 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겁니다. TSMC로서는 최대한 연막을 치고 본격 투자를 늦추며 고민하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TSMC뿐 아니라 대만 정부도 그렇겠죠. 미국기업 반도체를 대신 만들어주는 최첨단 생산시설이야말로 대만 최대의 안보 무기인데, 이를 버릴 리 없을 겁니다. 현재 반도체 제조 부문 서플라이어들의 투자를 보면 대만의 TSMC 클러스터에 대한 대규모 투자가 오히려 늘고 있는 추세입니다.

여기까지는 미국과 대만의 관계만 생각한 것이고요. 중국이 미국 의도대로 될 것이냐의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미국의 봉쇄 전략으로 중국이 고전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속단은 이르죠.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로 러시아와 중국의 연계가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가 일단 예측 불허입니다. 러시아나 중국이나 외교와 전략의 달인들이기 때문에, 양국이 앞으로 어떤 식으로 함께 할 것인지 아직은 판단이 어렵습니다.

미국 바이든 정권은 올해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있는데요. 최근 고(高)인플레 상황을 막지 못한다면 경제 실정(失政)이 부각될 테고, 중간선거 참패로 이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국내경제를 살리지 못한다면, 중국 봉쇄의 군사적 비용, 반도체 생산의 미국 회귀에 들어가는 천문학적 비용을 차츰 감당 못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현재 미국의 양당 의석수는 상원이 민주 50 대 공화 50, 하원은 민주 221 대 공화 213(결원 1)이고요. 상원에서 민주당은 의장 표로 간신히 주도권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만약 중간선거 이후 상하원 다수가 전부 공화당으로 넘어가고 의회에서 협치에 제대로 성공하지 못한다면, 전략적으로 필요한 법안이 빨리 효력을 발휘하는 것도 어려워질 수 있죠.

게다가 인텔이 오하이오주에 건설하는 새로운 반도체 공장이 가동되는 것은 2025년 이후이고요. TSMC나 삼성전자의 신공장 가동도 2025년 전후입니다. 그 사이에 반도체 업계에 어떤 기술적·지정학적 변화가 있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또 미국이 거액의 보조금을 제공했다고 해서 인텔이 대만·한국의 제조능력을 금방 따라잡는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보스턴컨설팅에 따르면, 지속 가능한 반도체 공급망을 세계 규모로 재구축하려면 9000억~1조2300억 달러, 범위를 미국 내로 한정해도 3500억~4200억 달러(약 430조원~520조원)가 추가로 필요합니다. 문제는 이 모든 돈이 시장경제 관점에서는 굳이 지불하지 않아도 될 비용이라는 것입니다. 미국이 반도체 지원법안 등을 통해 일부 부담하겠지만, 전체 공급망과 시장의 부담으로 전가될 테고요. 궁극적으로는 비용경쟁력에서 우위를 점한 곳만이 살아남게 될 수도 있습니다.

마이크 폼페이오 전 미국 국무장관이 3일 대만 타이베이에서 차이잉원 대만 총통을 면담했다. /대만 총통실

◇대만의 2024년 차기 총통 선거가 고비... 현재 집권당인 민진당의 급진 독립파 후보가 당선된다면, 중국이 대만 무력침공 시도할 수도

대만의 정치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기업은 5년~10년을 내다봐야 하고, 그 이후에도 살아남고 성장해야 하죠. 하지만 정치 특히 선거정치는 지도자가 바뀔 때마다 크게 흔들릴 우려가 있다는 것이 큰 리스크입니다.

대만은 2000년 총통선거에서 야당 민진당의 천수이볜(陳水扁)이 총통에 당선돼 대만에서 첫 정권 교체가 실현됐습니다. 당시 여당이었던 국민당이 분열하면서 어부지리를 얻었죠. 천수이볜은 4년 임기인 총통 선거에서 연임해 8년(대만 총통은 연임까지만 허용)을 지냈고요. 이후 2008년 국민당이 정권을 되찾았습니다. 국민당 마잉주(馬英九) 총통도 연임해 8년을 지냈습니다. 이렇게 16년간 대만은 다른 정당, 다른 총통 아래 중국에 대해 강경(민진당)과 융화(국민당) 사이를 표류했죠. 이념적으로는 중국으로부터의 자립을 요구하면서, 물질적 번영의 전제인 중국 경제와의 관계는 끊을 수 없다는 것. 이 모순에 대만이 본격적으로 직면한 것이 이 시기부터입니다.

그리고 2016년 총통선거에서 민진당이 정권을 되찾았고, 차이잉원(蔡英文) 현 총통은 다시 중국과 거리를 두는 입장입니다. 다만 천수이볜 때처럼 독립지향의 언사를 노골적으로 쓰지는 않으면서 대만의 자립을 지키려는 자세이죠.

하지만 2024년 차이잉원 총통의 연임이 끝나고 새 정권이 들어서게 될 때 어떤 변화가 있을지가 큰 불안 요소입니다. 일단 올해 11월 26일의 통합 지방선거가 전초전이 될 텐데요. 직전인 2018년 선거 때는 여당인 민진당이 최대 야당 국민당에 크게 졌습니다. 당시 차이잉원 총통이 당 주석을 사임하는 등 2020년 총통선거의 재선이 어렵다는 예상이 많았지만, 이후 홍콩 정세가 대만 국민의 반중(反中)감정에 불을 붙이면서, 중국에 타협하지 않는 자세를 관철한 차이잉원이 연임에 성공했습니다.

현재로는 2024년 총통 선거에서도 차이잉원이 속한 민진당이 정권을 유지할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긴 한데요. 속단은 이릅니다. 대중 경제의존이 여전히 높은 채로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고통받는 대만의 모순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죠.

중국이 대만을 상대로 강온양면 전략을 강화하는 가운데, 최근에 놀라운 사건이 하나 일어났는데요. 작년 말 중국 당국이 차이잉원 총통이 이끄는 민진당에 헌금한 대만 대기업 파이스턴그룹(遠東集団)에 4억7400만위안(약 205억원)의 벌금을 매긴 겁니다. 표면적 이유는 파이스턴이 중국 사업장에서 환경보호 등 여러 항목에 대해 불법을 저질렀기 때문이라는 것인데요. 의도는 ‘중국에서 돈을 벌면서 ‘대만독립’ 세력에 자금을 대는 것을 용서치 않겠다’는 것입니다.

파이스턴그룹은 원래 상하이에서 대만으로 이주한 ‘외성인’이 세운 기업으로, 대만에서 기업헌금이 가장 많은 기업 중 하나입니다. 오랫동안 친중파 국민당을 지지해 왔지만, 국민당 정권이 힘을 잃고 2016년 민진당 차이잉원 정권이 탄생하자 헌금액을 국민당과 민진당으로 반반씩 하게 됐습니다. 그러다가 2020년 대만의 총통·입법 위원(대만의 국회의원 격) 선거에선 헌금의 대부분을 민진당에 냈었죠. 대만 내 비즈니스를 원활하게 할 목적이었겠지만, 이게 중국 정부의 노여움을 산 것입니다. 대만의 대기업은 아이폰 수탁생산업체로 알려진 홍하이(팍스콘)처럼 1990년대부터 중국에 진출해 성공한 기업이 대부분입니다. 따라서 재력 있는 기업의 대부분은 원래 친중파로 국민당 지지자가 많은 편이었죠.

그런데 이번 파이스턴그룹에 대한 중국 정부의 처분은 대만 기업에 대해 ‘중국에서 돈을 계속 벌 것인가, 아니면 민진당을 지지할 것인가’라는 양자택일을 노골적으로 강요하는 겁니다. 중국 정부의 최종 목적은 자금력 있는 대만기업과 민진당 정권의 관계를 끊는 데 있습니다. 이를 통해 올 11월 지방선거에서 민진당 정권의 자금줄을 끊고, 친중 성향인 국민당이 승리하도록 돕겠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 기세로 2024년 총통선거에서 국민당이 8년 만에 정권을 되찾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국의 시나리오일 것입니다.

실제로 이런 정치 공작에 직간접적으로 동원되는 대만 내 ‘스파이’만 수만 명이라는 보고도 있습니다. 대만의 타이베이 지방법원은 올해 1월에도 2020년 총통선거에서 중국 당국으로부터 받은 자금을 사용해 유권자에게 금품을 살포하며 국민당 후보 당선을 도우려 한 혐의로 5명에게 징역형을 선고했습니다. 이들은 중국 후난성에 진출한 기업가나 대만인과 결혼한 전(前) 중국인이었습니다. 대만인과 결혼해 대만 국적을 취득한 전 중국인은 40만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이중 일부가 중국 당국의 지시하에 대만 여론의 동요와 분단을 노린 각종 공작을 벌이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일단 중국은 2024년 총통선거에서 대만 독립파 민진당을 무너뜨리고, 친중인 현 야당 국민당이 정권을 잡게 한 뒤, 경제·문화·사회적으로 중국과의 협력을 한층 강화해 자연스럽게 흡수통일하는 것을 최선으로 여기겠죠.

하지만 정세를 보면 민진당이 2024년에도 정권을 잡을 가능성이 있고, 그렇게 되면 위험이 더 커질 수도 있습니다. 민진당에서 ‘포스트 차이잉원’으로 부상한 인물이 라이칭더(頼清徳) 부총통인데요. 차이잉원이 자립을 추구하면서도 중국을 너무 자극하지 않는 온건파인 반면, 라이칭더는 대만 독립을 공개적으로 외치는 급진파에 속합니다. 따라서 만약 라이칭더가 2024년 대만 총통이 된다면, 중국과 대만의 관계가 현재의 차이잉원 총통 때보다 더 심각한 위기 국면으로 치달을 가능성도 있죠.

이렇게 되면 2024년 이후 중국의 대만 침공 가능성이 정말 커질 수 있습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올해 가을 공산당 대회에서 3기 연임이 확실시됩니다. 3연임에 성공하면 시 주석 임기는 2027년까지로 연장되죠. 2024년에 라이칭더 같은 급진적인 대만 독립파가 총통에 오른다면, 시 주석이 2027년 자신의 임기가 끝나기 이전에 무력으로 대만을 통일한다는 극단적 방법을 쓸지도 모릅니다.

미국 인도태평양군의 데이비슨 전 사령관도 작년 3월 미 상원 군사위원회에서 “6년 이내에 중국이 대만을 침공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지요. 그 6년 이내라는 것은 시 주석의 3기 연임이 끝나는 2027년 이전이라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이번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21세기에도 얼마든지 국가 간 전쟁이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줬고요. 특히 중국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의 결과와 상관없이, 이번 사태를 통해 대만 침공 시나리오를 더 가다듬을 게 분명합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빠르게 제압하지 못한 큰 원인으로 ‘병참의 실패’를 꼽는 전문가들이 있는데요. 중국은 앞으로 대만 침공 시나리오에서 이런 문제점을 철저히 보완하겠지요. 그렇지 않더라도 사실 대만 유사시에 미군이 개입할 수 있을지 혹은 어떻게 어느정도로 개입할 것인지가 확실치 않습니다. 사실 병참의 핵심 거점이라고 한다면 중국은 대만 서안 바로 반대편 130km 떨어진 곳이지만, 미국의 경우 군사력을 투입하려면 괌이나 오키나와에서 와야 하기 때문에 많이 불리합니다.

대만과 해안을 맞댄 중국 쪽의 공군기지에서 전투기가 출격하면, 대만 TSMC의 본사이자 핵심 생산거점인 신주(新竹) 과학단지까지 5분이면 타격 가능합니다. 실제로 중국이 그럴 가능성은 작지만, 전 세계 첨단 반도체 생산을 사실상 독점한 TSMC가 중국의 군사위협으로부터 너무나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대만 국방부가 작년 12월 낸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군의 대만 침공 프로세스는 중국이 연습 명목으로 군을 집결시키는 것으로 시작됩니다.(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 전에 보였던 행태와 유사합니다) 그다음은 미사일로 대만의 방공 진지와 레이더·지휘소를 파괴하고 사이버 공격으로 대만 주력 부대의 기능을 마비시킨 뒤 제해·제공권을 확보합니다. 다음은 연안 부에 부대를 전개하고 서태평양에 함대를 집결시키고 첨단 대함 미사일 공격 등으로 미군의 개입을 막아 대만에 대한 전략적 포위망을 형성하는 흐름이죠.

상륙작전에 대해선 상륙함이나 수송기를 이용할 것으로 보입니다. 중국·대만 사이의 해협은 거리가 짧은 곳도 130㎞인데다, 지형이 복잡하고 깊이가 얕기 때문에 대만 서해안에 제대로 상륙하려면 여기에 맞는 첨단 상륙함이 필요한데요. 이런 상륙함은 작년부터 이제 막 도입되고 있기 때문에, 중국군이 충분한 양의 상륙함을 갖추려면 앞으로 몇 년 더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삼성전자 평택 캠퍼스(사업장). 삼성 파운드리 미래 전략의 핵심 거점이다. /평택시청

◇국가 기간산업 유지를 위한 지정학과 대전략이 어느 때보다 요구되는 시대... 한국, 미국 중심의 동맹 틀에 밀착하되, 강대국 사이에 끼인 나라로서의 전략 설정에 깊은 고민 필요

다시 정리하면, 대만 문제만 보더라도 반도체 산업의 경쟁논리뿐 아니라, 미·중 충돌, 국제질서, 지정학적 셈법, 강온 양면전략, 정치공작 등이 복합적으로 돌아가는 고도의 수 싸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반도체 산업뿐 아니라 원자재와 중요 핵심 소재·부품에 차례로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고, 핵심산업에서 지정학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더 절실히 깨닫게 되는 시대가 될 것이라는 겁니다.

한국도 미국을 중심으로 한 안보동맹 틀 속에서 ‘강대국 사이에 끼인 나라’로서 어떻게 국익을 지키고 더 번영할 것인지에 대해 더 큰 도전을 맞게 되겠죠. 대만 유사시에 반도체 핵심 생산국으로서 한국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될 수도 있고요. 여기에서 삼성전자의 전략적 판단뿐 아니라 정부의 외교와 통상·산업 정책, 장기적인 국익을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이 더 많이 요구될 겁니다.

물론 삼성 같은 민간기업은 기술적으로 돌파해줘야 할텐데요. 그것에 제약 받지 않도록 환경을 잘 조성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한국이 메모리에 이어 파운드리에서도 성공하려면, 훨씬 더 집중력을 낼 수 있는 노동환경, 조직 전체가 창의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기업문화를 만드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말하는 전문가도 있습니다. 건물의 설계도를 내밀면 그대로 만들어주는 시공사의 능력에 빗대어도 좋겠죠. 아무리 난공사라 해도 그것을 해내는 시공사가 있습니다. 반도체업계에 빗댄다면, 대만의 TSMC일 것입니다. 그런데 안 되는 것을 해내기 위해선 기존의 공학적 지식만이 아니라 새로운 접근법과 창의적 아이디어가 아주 많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창의력을 높이기 위해선 더 많은 인재를 연결하고 그들의 도움을 받아야겠죠. 그러려면 국가 간의 화합과 협력. 특히 기술과 인재를 가진 이웃나라와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당장은 대중적인 인기를 얻기 어렵거나 일부의 국민감정을 거스르는 일이 있더라도 국민을 어떻게든 설득해서 말입니다.

강대국 사이에 끼인 나라인 한국이 장기적으로 계속 번영하려면 정치가가 반드시 해야 할 책무가 있겠죠. 점점 더 어려워지는 지정학적 환경에서, 한국이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내며, 계속 번영하고 미래 세대에 더 많은 부를 안겨줄 수 있는 나라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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