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코드(decode): 부호화된 데이터를 알기 쉽도록 풀어내는 것. 흩어져 있는 뉴스를 모아 세상 흐름의 안쪽을 연결해 봅니다.

한국 반도체 기업의 미래에 대한 부정적 전망이 많아졌습니다. 단기적으론 주력인 메모리 시황이 나빠질 수 있다는게 큰 이유인 것 같고요. 중·장기적으론 계속되는 미·중 충돌, 인공지능(AI)이나 이종집적(Heterogeneous Integration) 설계 등의 반도체 기술 트렌드가 한국에 불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언급되고 있죠.

관점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을 겁니다. 최근의 미·중 상황과 그에 따른 지정학적 관점을 통해 한국 반도체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래의 3가지 포인트입니다.

1. 중국이 미국의 견제를 이겨낼 가능성

2. 중국과 대만의 경제적 밀착이 더 강화될 가능성

3. 한국의 반도체 지정학적 가치가 더 높아질 가능성

글이 길기 때문에, 말씀드릴 내용의 요약을 먼저 쓰고 그 다음에 3가지 포인트를 차례로 설명 드리겠습니다. 우선 내용 요약입니다.

최근의 통계 등으로 볼 때 중국이 미국의 견제를 이기고 경제력을 더 키울 가능성이 있다. 그때 반도체 공급망을 둘러싼 정치적 상황이 어떻게 될지 미리 생각해 둘 필요가 있다.

미국이 TSMC로 대표되는 대만의 대중 반도체 핵심공급망을 일부 끊어내긴 했지만, 대만 전체의 대중국 반도체 공급망은 거의 손상되지 않았다. 앞으로 대만의 대중화권 내 역할이 줄어들지 않을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한다. 그럴 때 미국이 어떤 스탠스를 취할지 큰 그림을 예상해 볼 필요가 있다.

현재 TSMC가 미국 심지어 일본에도 신공장을 짓는다는 방침이지만, 아직 가동되려면 멀었고 규모 역시 유동적이다. 미국의 자국 반도체 산업 지원 강화로 힘을 얻은 인텔이나 마이크론은 위협적이지만, 이 역시 코로나 여파가 생각보다 오래가는 것과 미국 정치권의 합의 지연 가능성 등으로 인해 얼마나 빨리 효과적인 변화를 이끌어낼지는 좀더 지켜봐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 반도체의 지정학적 중요성은 특히 미국의 관점에서 더 커질 수 있다. 미·중 사이에 끼인 상황에서도 앞으로 중요성이 더 부각될 가능성이 있다.

특히 삼성전자 평택 사업장의 ‘규모’와 ‘집적능력’은 당분간 전세계 어디에서도 (파운드리로만 한정하면 TSMC 정도를 빼고) 필적하기 어려운 수준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다.

반도체 생산의 경쟁력은 얼마나 크게, 모든 능력을 제대로 모으냐에 있다고 봐도 된다. 반도체는 기본적으로 운송에 비용이 많이 드는 제품이 아니기 때문에, 정치적 이유가 아니라면 굳이 생산시설을 흐트러트릴 이유가 없다. 일본이 과거 대기업과 정치권이 결탁해 지역 균형발전이라는 미명으로 각 지역마다 반도체 공장을 쪼개 지었는데, 이게 결국 재앙적인 결과를 낳았다.

큰 그림에서 봤을 때 삼성전자나 TSMC나 핵심은 당연히 자국 시설이 될 것이고, 특히 삼성 평택 사업장의 경쟁력이 앞으로 어떻게 드러날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

이상 내용 요약이었습니다. 그럼 본론 시작합니다.

왕이(오른쪽) 중국 외교 담당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이 28일(현지시각) 톈진에서 자국을 방문한 아프가니스탄 무장 조직 탈레반의 2인자 물라 압둘 가니 바라다르(왼쪽)와 면담하고 있다. /중국 외교부

◇1. 중국이 미국의 견제를 이겨낼 가능성

미국의 대중 무역 제재가 시작된지 3년 넘게 흘렀습니다. 효과는 어느정도 나타나고 있을까요?

최근의 무역·투자 통계 등을 보면, 미국의 조치가 중국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는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중국의 대미 수출은 2019년에 4186억달러로 전년 대비 12.5% 감소하면서 효과를 거두는듯 했지만, 2020년엔 7.9% 증가한 4518억달러로 회복됐고요. 올해 1~5월의 대미 수출은 2060억달러로, 전년 동기보다 49.8% 증가했습니다. 미·중 무역전쟁이 벌어지기 전인 2018년과 비교하면, 당시 수준을 회복했습니다.

외국기업의 대중 직접투자를 보면, 작년은 전년 동기보다 4.5% 증가한 1443억7000만달러였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전세계 직접투자가 감소했지만 중국은 오히려 늘었죠. 올해 1~5월에는 전년 동기보다 35.4% 증가한 770억달러에 달했습니다. 또 올해 1~6월 중국 채권시장으로의 자금 유입액은 700억달러에 달했습니다. 중국 장기 금리가 다른 주요국보다 높은 것도 매력이지만, 기본적으로 중국 경제에 대한 긍정적 전망을 반영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겠죠.

물론 부동산 레버리지 과잉이나 저출산·고령화 등의 문제가 있긴 하죠. 그래도 무지막지하게 돈을 풀어 경기를 부양한 미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돈을 풀지 않고 경제를 유지하고 있는 중국의 저력을 무시하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럼 미·중 충돌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까요?

우선 최신의 지정학적 상황을 갖고 얘기해 보겠습니다. 20년간 이어졌던 아프간 전쟁에서 미국이 패퇴했죠. 2조달러 넘게 쏟아부었고 미국 젊은이 23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은 이 전쟁에서 미국이 발을 빼는건 당연한 일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민주주의와 인권 수호를 외교정책의 기둥으로 삼은 바이든 정부로선 정권의 명분·리더십이 손상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민주적으로 선출된 가니 정권의 붕괴를 방관한 꼴이 됐기 때문이죠. 아프간에서 여성·인권 문제가 심각해지면 미국에 대한 비난이 커질 수도 있습니다.

중국에는 큰 빌미를 줬습니다. 바이든은 특히 중국 인권 문제를 공격해 왔죠. 중국은 말할 겁니다. “미국도 인권 대신 자국 이익 챙기느라 발을 빼지 않았나? 미국의 동맹국이여, 미국을 믿지마라”라고요. 환구시보는 8월 16일 “미국의 아프간 철수는 미국이 동맹국과 맺은 약속을 신뢰할 수 없음을 보여준 것”이라고 썼습니다.

여기서 중요한게 중국의 외교 행보입니다. 지정학의 ABC를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가장 센 적을 물리치기 위해 그 적의 적과 손 잡는다.’ ‘최대 적을 물리치기 위해 그보다 약한 적과는 친하게 지낸다’ 뭐 이런 것들이죠.

힘의 공백이 생긴 중동을 중국이 노리는 상황입니다. 미국이 셰일오일 증산으로 석유 순(純)수출국이 되고 중동 석유 의존도가 낮아지면서, 외교안보 축을 중동 안정에서 중국 견제로 옮겨간 사이에 말입니다.

이미 중국은 중동의 여성·인권 문제를 지적하는 미국에 대항해 전선을 구축하기 시작했죠. 왕이 외교부장은 지난 4월 사우디·터키·오만 등 6개국을 순방하며 ‘미국은 인권을 구실로 각국의 고유한 권리를 빼앗으려고 하고 있다. 미국의 내정간섭에 반대한다’는 원칙을 함께 했습니다. 순방은 중국의 소수민족인 위구르인에 대한 탄압에 관련해 미국이 대중국 제재를 발표한 직후 이뤄졌지요.

아프간은 지정학적으로 중국에 중요합니다. 중국 서부에서 파키스탄을 지나 아라비아해로 이어지는 일대일로의 지선(支線) 혹은 중계점이 될 수 있는데다, 인접한 신장·위구르 자치구의 안정에도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중국 외교부 화춘잉 대변인은 8월 16일 회견에서 탈레반과 중국이 소통해온 점을 강조했고요. 지난 7월엔 왕이 외교부장이 탈레반 간부와의 회담에서 “탈레반이 아프간 평화·화해·부흥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며 탈레반을 한껏 추켜세웠고, 탈레반 측은 “중국이 아프간 재건과 경제 발전에 더 큰 역할을 해 주길 바란다”고 응수하기도 했습니다.

일부에선 탈레반의 아프간 장악이 중국 신장·위구르 불안을 증폭시킬 수 있다고 하는데요. 아닐 수도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중국이 오랫동안 중동에서 사전정지 작업을 벌여왔거든요. 이미 중국은 지역강국 이란과 중국의 거액투자와 이란의 원유·천연가스 공급을 맞바꾸는 내용의 25년짜리 포괄 협정을 맺었지요. 중국과 이란은 미국과 적대적이라는 입장을 공유합니다. 미국이 화웨이 부회장이자 창업자 딸인 멍완저우를 캐나다에서 체포하고 화웨이를 때린 것도 발단은 화웨이 부품의 이란 수출 의혹이었습니다. 당시 미국이 제재하고 있던 이란에 화웨이가 ‘불법’으로 우회수출했다는 것이었죠. 이란·중국 입장에선 미국이 공동의 적입니다.

또 세계최대 원유 수입국인 중국은 이미 이라크의 최대 교역국이죠. 이라크 수출의 3분의 1이 대중 석유 수출입니다. 사우디와 UAE의 최대 교역국도 중국입니다. 중국은 중동 최대 외국인 투자자이고요. 탈레반에도 미군 철수 이후 막대한 에너지 인프라 투자를 약속했습니다. 아프간은 석유·희토류 자원의 보고입니다.

이런 때문일까요? 사우디·이집트·쿠웨이트·이라크·UAE 등은 성명과 유엔에 보낸 공동서한에서 신장·위구르 자치구의 수용시설과 이슬람교 탄압에 대해 ‘반(反)테러 탈급진화 대책’이라며 이를 수용한다는 입장을 밝혔죠. 같은 이슬람교도이지만, 중국의 탄압을 못본척 하고 있는 겁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작년 9월 흥미로운 기사를 실었는데요. ‘미국의 목표가 아시아에서 중국의 야망을 막고 일본·한국·대만 등의 동맹국들을 지원하는 것이라면 중동 철수는 절대 안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한·일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이 중동으로부터 해상을 통해 석유를 공급받기 때문이죠. 아라비아반도 중요 해역의 지배권을 중국에 넘기면 아시아 국가들이 미국과의 전략적 동맹 관계를 재고해야 하고, 중국의 압력에도 더 영향을 받기 쉬워진다는 겁니다.

유럽의 맹주 독일, 과거의 아시아 패권국 일본은 어떨까요? 미국의 중국 경제 제재는 미국 우방국의 경제적 이익마저 빼앗는다는 측면에서 효과 지속에 회의적 시각이 존재합니다. 트럼프 전 정부에 이어 바이든 현 정부에서는 더 노골적인 자국 중심주의, 보호무역주의 색채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코로나 여파로 세계 경제가 신음하는 상황에서, 미국 우방들도 결국 자국 이익을 향해 움직일 수 밖에 없다는 거죠.

공산품 중 최대 시장인 자동차를 예로 들어볼게요. 자동차 강국 독일·일본은 중국에서 가장 큰 돈을 법니다. 중국의 작년 신차(상용차 포함) 판매는 2531만대였는데, 같은 기간 2위 미국보다 80%나 많았습니다. 벤츠·BMW·아우디 등 독일 고급차 3사의 작년 중국 판매는 역대 최고였는데요. 세계 판매에서 중국의 비중은 벤츠 36%, BMW 33%, 아우디 43%에 달했습니다. 일본차 회사들도 작년 중국에서 520만대를 팔아 역대 최대치를 찍었습니다. 중국 판매량이 일본 자동차 시장 규모(작년 460만대)를 넘어선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자동차산업의 미래라는 전기차 시장도 중국이 가장 큽니다. 올 상반기 중국의 전기차 판매는 101만대로, 세계 2위 유럽(48만대)의 2배가 넘었습니다. 플러그인까지 포함해도 중국은 121만대, 유럽은 101만대였습니다. 반면 같은 기간 미국의 전기차(플러그인 포함) 시장은 20만대가 조금 넘는 수준이었습니다.

반도체에선 중국이 미국에 한방 크게 맞았지만, 반도체보다 더 크고 장기적이 될 데이터 전쟁에선 미국이 중국을 이기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있습니다.

또 지난 8월11일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연구자 인용 상위 10%에 드는 ‘주목 논문’ 수에서 중국이 처음으로 미국을 앞질러 1위에 올랐습니다. 8개 분야 중 재료과학·화학·공학 등 5개 분야에서 중국이 1위였습니다. 미국은 임상의학·기초생명과학에서 1위를 차지했지만, 산업 경쟁력과 직결된 분야에선 중국이 강세였습니다. 중국은 연구자 수도 210만명으로 세계 최다입니다. 2018년에 155만 명이었던 미국을 넘어선 뒤 줄곧 1위입니다.

정리하면, 미국이 아시아 동맹국들을 연합해 중국을 때리고 있지만, 그렇게 해서 무너지기엔 중국의 내부 역량이 강하고, 중국이 외교 혹은 자국 시장의 힘을 이용해 중동·독일·일본 등을 끌어들임으로써 미국의 응집력을 약화시키는 등 미국을 다각도로 괴롭히고 있다는 것입니다. 중국의 의도가 어느정도 실현될 경우, 미국의 아시아 회귀 전략, 그리고 이를 통한 중국 제압이 뜻대로 이뤄지지 않을 가능성도 높다는 것이죠.

TSMC. /로이터연합뉴스

◇2. 중국과 대만의 경제적 밀착이 더 강화될 가능성

그렇다면 대만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전문가도 아닌 제가 예측하긴 어렵지만, 대만 경제 상황을 볼 때 미국이 원하는 탈(脫)중국은 쉽지 않아 보입니다. 미국은 중국을 세계 반도체공급망에서 분리시키려 했지요. 중국의 반도체 공급기지나 다름 없던 대만을 중국에서 떼어내려고 했습니다. 이를 통해 중국의 IT·반도체 굴기를 저지시키거나 그 속도를 늦춰보려는게 미국의 의도였을 겁니다.

현재 중국과 대만의 무역공조 체제는 무너졌을까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대만 수출은 역대 최대치를 계속 경신 중이고, 그 가운데 중국으로의 수출 비중도 전혀 줄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만의 지난 7월 수출은 전월 대비 3.5%, 전년 동월 대비 34.7% 증가한 379억5400만 미국 달러(44조7000억원)로 월별 최고를 경신했는데요. 전체 수출액의 41%가 중국(홍콩 포함) 대상이었습니다. 중국 다음으로 수출이 많은 지역은 아세안으로 16.3%를 차지했습니다. 미국은 14.7%로 3위를 차지했습니다. 그 밖에는 유럽 7.9%, 일본 6.8%, 한국 4.5% 순이었습니다. 제품별로는 전자부품이 전년 동월 대비 33.6% 증가한 146억7100만 달러였고, 그 가운데 반도체가 132억 2100만 달러로 34.3% 증가했습니다. 전체 수출에서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은 34.8%였습니다.

대만의 중국 수출 비중은 매달 40%를 훨씬 넘고 있습니다. 올해 1~5월 기준으로는 42%였고요. 올 6월만 따지면 44%에 달했습니다. 대중국 수출은 작년에 1514억달러로 전체의 44%를 차지하며 사상최고를 기록했었는데요. 미국의 대중 무역제재가 한창인 현재 시점에서도, 대중 수출 비중이 거의 줄지 않은 셈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앞으로 대만의 중국 경제 밀착 정도가 줄어들까요?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미국의 대중 반도체 규제가 심각해진 작년 초, 중국 사정에 정통한 대만 반도체 전문가 상당수는 “중국이 반도체 피해를 회복하는데 데 3년 정도 걸릴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결국 중국이 2022년, 2023년쯤이면 회복할 것이라는 얘기였죠.

중국이 아직 미국의 반도체 제재로 인한 피해에서 회복하지 못한 상황에서도 대만의 대중 반도체 수출이 줄지 않고 있는데요. 앞으로는 어떨까요? 대만 반도체 수출의 중국 의존이 크게 줄어들 가능성은 낮아 보입니다.

물론 대만 TSMC는 중국 수출 비중이 줄었지만, 대만 2위 세계 3위 파운드리인 UMC는 중국 의존도가 압도적입니다. UMC의 올 2분기 순이익은 전년 동기비 79% 증가한 119억 대만달러(약 5000억원)였고요. 매출은 15% 증가한 509억 대만 달러(약 2조1000억원)로 분기 사상 최대였습니다. 더 중요한건 지역별 매출인데요. 중국이 무려 63%나 됩니다. 북미(22%), 유럽(8%), 일본(7%) 등의 비중은 중국에 비해 크지 않았습니다.

또하나 봐야 할 기업이 대만 최대 팹리스인 미디어텍입니다. 올 2분기 순이익이 275억 대만달러(약 1조2000억원)로 전년 동기비 3.8배였습니다. 매출도 86% 증가한 1256억 대만달러(5조3000억원)로 순이익과 함께 분기 사상 최대였습니다. 미디어텍의 주력제품은 스마트폰 칩입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샤오미·오포 등 중국업체로 수출합니다.

어떻습니까. 대만의 반도체 3대장 중 2개인 UMC와 미디어텍은 중국 의존도가 압도적입니다. TSMC도 중국을 크게 의식하고 있을 겁니다. 중국 정부는 TSMC에 계속해서 당근과 채찍을 안기며 회유 중입니다. TSMC로서는 살아남기 위해 계속 주판알을 굴릴 수 밖에 없습니다.

TSMC는 이미 인텔 반도체 공장의 본거지인 미국 애리조나주 챈들러 근처에 신공장을 가동할 예정이지만, 규모를 놓고 TSMC와 미국 쪽 얘기가 다릅니다. 미국은 대규모 공장이 될 것처럼 얘기하지만, TSMC는 어디까지나 소규모일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죠. 주력은 대만 자국 공장이라는 겁니다.

미국으로선 대만이 주력 공장을 미국에 짓기를 원하겠죠. 자국 반도체회사 대부분이 팹리스이고 생산을 대만에 위탁하고 있으니, 대만에서 긴급사태라도 발생한다면 피해가 심각할 겁니다.

하지만 대규모 파운드리 시설엔 최소 조 단위, 많으면 십조원 단위 투자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규모’와 ‘집약’이 경쟁력을 좌우하지요. 이미 대만에 거대한 시설을 집약시켜 경쟁력을 높이고 있는 TSMC로선 기존 기반을 더 키우고 전력을 집중하는게 합리적입니다. 전력을 멀리 떨어진 타국에 집중한다는 것은 엄청난 손실이죠. 이를 두고 TSMC와 미국 사이의 수 싸움이 아직도 끝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TSMC는 일본공장도 추진 중인데요. 여긴 미국공장보다 더합니다. 최근 TSMC는 주총에서 “일본공장 비용이 너무 높다”면서 검토가 끝나지 않았다고 얘기했습니다. 일본 정부와 딜해서 최대한 유리한 조건을 끌어내겠다는 심산이고요. 그렇더라도 대만 주력시설과 다른 후공정 일부가 들어갈 것으로 보입니다.

정리하면, 미국이 가장 주시하는 TSMC 이외의 대만 주력기업은 미국의 대중 제재 이후에도 중국과의 경제적 밀착이 더 세졌고요. TSMC 역시 중국정부의 시장을 무기로 한 끊임없는 회유·압박 앞에 어떻게 될지 모를 수 있습니다.

삼성전자 평택 캠퍼스 전경. /삼성전자

◇3. 한국의 반도체 지정학적 가치가 더 높아질 가능성

지정학적으로 앞서 언급한 부분에 가능성이 있다면, 한국의 반도체는 앞으로 어떤 위기와 기회를 맞을 수 있을까요?

위기는 이전 글에서 많이 말씀드렸으니 이번엔 기회 중심으로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우선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등이 국내에 조성하고 있는 반도체 생산시설의 규모는 세계적으로도 비교 대상이 거의 없을만큼의 규모와 집적능력을 자랑한다는 겁니다. 특히 삼성전자 평택 사업장은 전세계 반도체 기업이 만든 생산거점 가운데 세계최대 규모입니다.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니며, 앞으로 어떤 대내외적 변화·위기가 오더라도 중장기적으로 한국 반도체 경쟁력 향상에 큰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두가지 얘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내가 여태까지 본 건물들 가운데 가장 큰 것 중 하나였다. ‘도대체 저게 뭐야(What the hell is that?)’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은 2019년 6월 방한 첫 일정으로 평택의 ‘캠프 험프리스’를 방문하고 헬기로 용산 미군기지로 이동하던 중에 거대한 건물을 봅니다. 삼성전자 평택 사업장이었죠. 사업가 출신인 트럼프 대통령은 본능적으로 알았던 겁니다. 이 건물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요.

지난 6월15일자 닛케이산업신문도 1면에 대대적으로 삼성전자 평택 사업장을 다루면서 그 ‘규모’에 주목했습니다. 닛케이는 “공장 부지가 일본 최대의 반도체 공장인 키옥시아(전 도시바) 욧카이치 공장의 4배에 달한다”고 이 부분을 강조했죠. 반도체는 작고 가볍기 때문에 운송비가 낮습니다. 또 산업 특성상 한 곳에 집중 투자해 양산하는 것이 경쟁력을 높이는데 가장 유리합니다. 따라서 일본 반도체 전문 기자도 평택공장의 규모와 시설 집적도 자체가 경쟁력임을 강조했던 겁니다.

과거 일본은 반도체 대기업과 정치권이 결탁해 지역 균형발전이라는 미명 아래 반도체 공장을 각 지역마다 쪼개 지었습니다. 지금도 일본 지역마다 오래된 작은 반도체 공장이 많죠. 일본 반도체 경쟁력을 좀 먹은 원흉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 일본이 볼 때 삼성전자 평택공장은 놀라움이자 두려움입니다. 규모를 최대한 키우고 한 곳에 핵심시설은 물론 서플라이어 기반까지 모든 것을 집약시킴으로써, 가장 강력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으니까요.

평택 사업장은 삼성의 기흥·화성에 이어 삼성의 한국내 3번째 반도체 거점입니다. 연간 30조원이 넘는 설비투자 대부분을 평택에 쏟아 세계 1위 메모리 반도체, 세계 2위 파운드리 경쟁력을 더 끌어올린다는 계획입니다. 삼성은 평택에 총 6개의 공장을 지을 계획입니다. 이미 2개가 가동 중인데, 축구장 25개 면적의 클린룸을 가진 제3공장 건설을 지난 5월 발표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요 서플라이어들도 모두 집결한다는 겁니다. 네덜란드 ASML, 미국 어플라이드머티리얼스 같은 세계최대 반도체 제조장비 기업들이 평택 사업장 근처에 들어갑니다. 여기에다 국내외의 크고 작은 소재·부품 기업들이 모두 모이게 되죠.

그럼 마지막으로 1번과 2번 즉 중국의 부상과 대만의 중국 경사 심화 가능성과 관련해 한국이 가질 수 있는 반도체 지정학적 기회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주 단순히 얘기하면, 결국 미국은 한국의 반도체 생산능력을 더 중시하고 한국과 더 협력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런 반도체 지정학적 특성과 변화를 잘만 활용한다면 미국과 중국 사이에 끼인 한국의 처지에서 오히려 더 많은 기회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겁니다.

대만의 TSMC가 파운드리 분야에서 압도적 경쟁력을 갖고 있더라도 미국 입장에서 불안할 수 밖에 없습니다. 중국과의 경제적 밀착은 제아무리 미국이라도 끊어내기 어렵습니다. 대만 수출의 절반 가까이가 중국 쪽이니까요. 미국이 이를 대체하는건 불가능합니다. 정치 이전에 먹고사는 문제입니다. 중장기적으로 대만의 중국 경사는 심해지면 심해졌지 줄지 않을 거라 봅니다. 대만이 대중화권 일원으로 더 많은 역할을 하게 될 때, 미국이 대만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 지금 미국의 정치인도 확답을 줄 수 없을지 모릅니다.

또 대만은 중국에 지리적으로도 너무 가깝습니다. 중국이 대만을 침공할 경우 미군이 대만에 빨리 지원군을 투입해 침공을 막아낼 수 있을지에 대해 회의적인 전문가도 많습니다. 물론 변수가 너무 많긴 하지만, 미국으로선 항상 우려할 수 밖에 없는 요인입니다.

또 대만은 지진 위험이 적다고 할 수 없습니다. 20년 전부터 ‘대만에 큰 지진이 나 TSMC 반도체 제조라인이 몇mm만 어긋나도 전세계 전자제품 출하가 중단된다’는 얘기가 있었지요. 그렇다고 대만의 파운드리 주력라인을 미국으로 옮긴다는건 말이 안됩니다. 너무 많은 돈이 들고 너무 많은 비효율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는 제아무리 TSMC라도 세계최고의 경쟁력을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단순히 얘기하긴 어렵지만 한국 반도체가 앞으로도 메모리 뿐 아니라 파운드리 분야에서 경쟁력을 높여갈 가능성은 높습니다. 이미 반도체 분야에서 쌓아놓은 기반이 지정학적으로도 매우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도체 산업의 기술흐름이 AI나 이종집적으로 가더라도, 고성능메모리, AI나 이종집적에 특화된 첨단 메모리 수요는 더 늘어날 것입니다. 특히 삼성이 쏟아붓고 있는 연구개발·시설 투자, 그리고 밖으로 아직 드러나지 않은 AI나 이종집적 기술 트렌드에 대비한 준비 등이 결국 빛을 발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일본 반도체 전문기자도 지목했듯, 삼성 평택 사업장이 앞으로 보여줄 규모와 집적도 면의 경쟁력은 전세계 어디에서도 당분간 따라가기 어려운 수준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평택공장과 30km 거리 내에 기흥·화성 등 기존 공장이 있어 기술자의 왕래도 쉽지요. 이런 규모와 물리적 집적능력은 반도체 제조 경쟁력 향상에 매우 중요하고, 앞으로 더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또 서울 이남 수도권은 지진이 거의 없고 하천도 많아 용수 확보가 쉽죠. 대만의 TSMC는 가뭄으로 인해 용수 확보를 못해 가동이 중단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여러가지 것들이 미국의 반도체 지정학 관점에서 한국의 가치를 더 높여줄 것입니다.

삼성 반도체 부문은 이미 중국 산시성 시안 공장,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 공장을 갖고 있지만, 정치적으로 볼 때 미국에 더 투자해야 할 것이고, 실리적으로 볼 때 중국에도 더 투자해야 할겁니다. 미국의 패권이 오래가겠지만 중국도 계속 성장할 테니까요.

그래도 핵심은 말할 것도 없이 한국이죠. 그중 핵심은 평택이 될 것입니다. 반도체 두뇌집단인 생산기술연구소를 둔 화성과 최첨단 반도체를 양산하는 평택을 거점으로 미래를 차근차근 준비해나간다면 세계 톱클래스 반도체 경쟁력을 앞으로도 유지해나갈 수 있을 겁니다. 아무리 국제 정세가 춤을 추고 미·중 격돌이 거세지더라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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