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화장품 ODM(제조자 개발 생산) 1위인 코스맥스그룹은 최근 신입 사원 공채를 진행하면서, ‘인공지능(AI) 활용 역량 우수자’ 우대 조항을 신설했다. 자기소개서에는 ‘AI 도구를 활용해 본인의 한계를 보완하거나 효율을 높인 경험’을 적으라는 문항도 추가했다. 회사 관계자는 “치열한 내부 논의 끝에 올해 공채를 진행하기로 한 결정적 이유는 결국 AI 인재를 선제적으로 확보해야 한다는 절박함 때문”이라고 말했다.
지난해만 해도 ‘AI 쓰면 탈락’이라던 기업들의 채용 원칙이 올 들어 ‘AI 못 쓰면 탈락’ 분위기로 180도 바뀌었다. 생성형 AI로 자기소개서를 쓰면 일종의 ‘반칙’이란 인식이 많았지만, 최근 1년 새 AI가 빠르게 확산하고 AI를 잘 다루는 직원과 그렇지 않은 직원 사이의 생산성 격차가 뚜렷이 드러나면서, AI를 자유자재로 활용해 성과를 끌어올리는 이른바 ‘AI 네이티브’를 확보하려는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는 것이다.
◇AI로 ‘정답 없는 문제’ 해결 능력 평가
채용 전형 자체를 AI 중심으로 재편한 사례도 나오고 있다. 패션 플랫폼 무신사는 4년 만에 주니어 개발자 공채를 진행했다. AI가 웬만한 코딩은 모두 처리하는 시대에 나온 이례적인 신입 개발자 채용에 2000명이 몰렸다. ‘AI 네이티브’라 이름 붙인 이번 시험은 이력서가 필요 없는 지원 방식에, 개인이 구독 중인 AI 도구도 자유롭게 쓸 수 있도록 허용하는 등 여러 면에서 파격적이었다. 특히 시험장에서는 ‘수강 신청 기간마다 서버가 다운돼 학생 불만이 폭주하니 제대로 된 시스템을 만들어 달라’는 대학교 기획팀의 짧은 메모와 몇 가지 기능적 요구 사항만 제시됐다.
선발 과정을 총괄한 김상범 무신사 엔지니어링 담당 임원은 “답이 정해져 있고, 어떻게 푸느냐를 확인하는 전통 코딩 테스트는 AI가 1분이면 푸는 시대”라며 “의도적으로 모호한 요구 사항을 주고, 동등한 AI 환경에서 스스로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하는 과정을 보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결국 정답 없는 문제를 풀어낸 66명이 최종 관문을 통과했다. 카카오도 최근 창사 이래 첫 그룹 공채를 진행하며 ‘AI 네이티브’ 인재 확보를 전면에 내세웠다. 회사 측은 “일찍부터 신기술에 노출된 청년 세대야말로 혁신의 동력이 될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라고 했다.
대기업 채용도 변하고 있다. SK그룹의 AI 계열사 SK AX는 신입 채용에 ‘AI 리터러시 인증 시험’을 도입했다. 지원자가 AI와 대화하며 실제 업무에서 발생하는 사업 기획, 소프트웨어 개발, 시장 조사, 인사 전략 등 각종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평가하는 것이다. 프롬프트(명령어)를 만드는 역량뿐 아니라 AI로 제작한 각종 보고서와 코딩의 품질까지 살핀다. SK그룹은 연내 다른 계열사로도 이 시험을 확대할 계획이다.
◇‘AI 네이티브’ 등장에 직원들은 긴장
면접장의 화두 역시 ‘AI 활용 능력’이 되고 있다. 면접관들에게 “AI를 활용할 줄 압니다”라고 답하는 건 “구글 검색할 줄 압니다”라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얘기가 됐다. 스타트업 채용 컨설팅 기업 캔디드 관계자는 “기업이 원하는 사람은 AI를 활용해 이전과 다른 결과를 만들어 본 사람”이라며 “AI로 해결한 문제는 무엇이고 AI가 틀렸을 때 나는 어떻게 보완했는지를 답변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 같은 변화는 기존 직원들에게 적잖은 긴장감을 주고 있다. 주요 그룹 총수들이 신년사에서 일제히 AI를 강조한 데 이어, ‘AI 무기’를 장착한 신입 사원들이 대거 유입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 대기업 부장급 직원은 “이제 위아래로 AI의 압박이 오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