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일 호르무즈해협에 미사일 불발탄으로 추정되는 물체가 떨어져 검은 연기가 솟구치고 있다. 양측 공방이 격렬했던 전쟁 초기 이런 장면을 본 선원들 중 적지 않은 이가 트라우마를 호소하고 있다고 한다. /HMM해원연합노조

“새떼만 날아와도 자폭 드론인 줄 알고 소스라치게 놀라기 일쑤라고 합니다.”

7일 전정근 HMM 해원연합 노조위원장은 호르무즈 해협 안에 갇힌 동료 선원들의 일상을 이렇게 전했다. 지난 2월 28일 미국과 이란의 전쟁이 발발한 지 한 달이 넘었지만, 호르무즈 해협 안에는 우리 국적 선박 26척과 한국인 선원 173명이 갇혀 있다. 배마다 보통 한국인 10명 안팎과 수십명의 외국 국적 선원이 함께 타고 있다고 한다. 대형 유조선 7척을 포함한 26척의 선박은 현재 이란 본토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바레인·카타르 인근 해역에 떠 있다.

현지 선원들과 연락하며 이들을 지원하고 있는 전국해상선원노동조합(선원노련) 관계자는 “선원들이 한 달 넘게 ‘전쟁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공포와 싸우고 있다”고 전했다. 사실상 전쟁 한복판에 한달 넘게 갇힌 탓에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는 선원이 많다고 한다. 만에 하나 선박이 미사일이나 드론 테러의 대상이 될까봐 걱정하는 것이다. 양측 공방이 격렬했던 3월 초 선박 주변에 수시로 요격 미사일 잔해나 불발탄이 떨어지고 가까운 항만에서 불길이 치솟는 걸 목격한 선원도 많았다. 지난주 이란이 이스라엘을 향해 쏜 것으로 추정되는 미사일을 배에서 본 이도 있다. 선원노련 관계자는 “평소처럼 휴대폰을 보며 생활하다가도 육지에서 간간이 폭발음이 들릴 때 마음이 무거워진다고 하더라”고 했다.

호르무즈 해협에 체류중인 선박 옆으로 떨어진 불발탄. /HMM해원연합노조

◇“새떼만 봐도 놀라…트라우마”

우리 국적 선박들이 정박 중인 해역은 이란 본토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어 직접 공격을 받을 우려가 낮은 곳이라고 한다. 외신 보도로 일부 외국 선박의 열악한 상황이 알려진 것과 달리, 우리 국적선들은 식수·식료품 조달에선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상황으로 전해졌다. 또 스페이스X의 위성 인터넷 서비스 스타링크 등을 통해 친지 등과 영상통화, 메신저 등으로 대화가 가능한 것도 선원들이 버틸 수 있게 하는 힘이다.

가장 걱정하는 건 의학적으로 위급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전정근 HMM 노조위원장은 “의약품 재고가 넉넉하지 않다”고 전했다. 일반 상선은 전문 의료 자격을 갖춘 선원이 없어 보통 응급 환자가 발생하면 헬기 등을 통해 현지 의료 시설로 이송하지만, 지금은 불가능한 상황이다. 치통에 시달리는 한 선원은 진통제로 근근이 버티고 있다. 선원들은 지금도 배 안에 적재된 화물의 이상 여부를 체크하는 일상적인 업무를 하지만 부상 위험이 있는 이른바 ‘헤비 워크’는 특히 조심한다고 한다. 부상이라도 당하면 손을 쓸 수가 없기 때문이다.

비축해둔 식료품 창고 어느 한국 국적 선박 안에서 근무 중인 선원이 식료품 창고의 재고 현황을 살펴보고 있다. /HMM 해원연합 노조
식사하는 선원들 호르무즈해협 인근에 정박해 있는 한국 국적 선박에서 식사를 차린 모습. /HMM 해원연합 노조

◇“비상사태 대비해 바닷물 걸러 식수로 써”

식량과 식수는 아직 임계 상황은 아닌 것으로 전해졌다. 페르시아만 내부에서 대기 중인 한 한국 선박은 식량과 식수가 각각 7주·4주 치 정도 남아 있다. 해운사 관계자는 “전쟁이 장기화할 경우 선주사와 선장 판단에 따라 인근 항만에 들어가거나 일부 선원이 보트를 타고 육지에 나가 물자를 구매하는 방식으로 대응할 생각”이라고 했다. 실제 한 선박은 지난주 식량 재고가 20일 치까지 떨어지자 추가로 보급을 받아 재고를 70일 치까지 늘렸다. 해협 안쪽을 정기적으로 오가는 배가 있어서, 필요한 경우 해상에서도 식수·식료품 조달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쟁이 길어질수록 부담이 커지고 있다. 전쟁 여파로 호르무즈 해협 주변국에서도 사재기와 가격 폭등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전정근 노조위원장은 “중동은 식료품을 수입에 크게 의존하다 보니, 해협이 막힌 뒤 사재기가 횡행하고 가격이 급등하고 있다”며 “쌀이 kg당 1.5달러에서 3달러 이상으로 뛰는 등 식료품 가격이 크게 올랐다”고 전했다. 식량 보급이 힘들어질 수도 있다는 점 때문에 일부 선박에선 생수를 아끼거나 바닷물을 거른 물을 식수로 활용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대형 선박들은 ‘조수기’라는 해수 담수화 기계가 있어 이를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선원노련 관계자는 “호르무즈 해협을 오가는 선원들은 우리나라 필수 전략 물자를 운반한다는 자부심으로 산다”며 “선원들이 중동 전쟁 최전선에서 자기 책임과 역할을 다하며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