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과 정부가 기름값의 ‘사후 정산제’를 폐지하기로 합의했다고 6일 발표했다. 사후 정산제는 정유사와 주유소가 일정 기간 거래한 기름 가격을 한번에 정산하는 제도다. 예를 들어 정유사가 주유소에 한 달 동안 일주일에 두 번꼴로 휘발유와 경유 등을 공급하고 그달 말일에 일괄해 거래 가격을 통보하는 방식이다.
사후 정산제가 논란이 된 것은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습 직후 갑자기 뛴 주유소의 기름 가격 때문이다. 과거 전쟁 등으로 국제 유가가 뛰면 국내 기름값에 반영되기까지 2주 정도 시차가 있었으나, 이번엔 시차 없이 움직였다.
이후 불안정한 국제 정세를 이용해 정유사, 주유소가 폭리를 취하려 한다는 지적이 뒤따랐다. 일부 주유소에서는 정유사에서 받아오는 기름값이 불투명해 석유 제품 가격을 먼저 올릴 수밖에 없었다고 항변했고, 제도의 적정성에 대한 논란이 일었다.
사후 정산제란 무엇이며, 정유업계는 왜 이런 제도를 도입했는지, 정말 자영 주유소는 깜깜이 영업을 하는 것인지 하나씩 확인해 봤다.
Q. 사후 정산제란 무엇인가?
A. 정유사가 주유소에 석유 제품을 공급할 때 확정 가격을 제시하지 않고, 일단 ‘임시 가격(가입금)’으로 납품한 뒤 약 한 달 뒤 시장 상황을 반영해 최종 공급가를 확정하고 차액을 정산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최종 공급가가 납품받았을 때의 임시 가격보다 비싸면 주유소는 차액을 정유사에 지불해야 한다. 거꾸로 최종 공급가가 싸면 주유소는 다음 달 석유 제품을 구매할 때 차액만큼 덜 결제한다.
Q. 왜 이런 제도가 생겨났는가?
A. 1997년 ‘석유 제품 가격 자유화’ 조치 이후 정유사 간 시장 점유율 경쟁이 치열해졌다. 이전엔 모든 주유소의 가격이 동일했기 때문에 정유사, 주유소 간 가격 경쟁이 거의 없었다.
자유화 조치 이후 정유사들은 시장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가격 경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매일 다르게 움직이는 기름값에 대응하기가 어려웠고, 결국 경쟁사 가격을 살핀 뒤 사후에 가격을 맞춰 주겠다고 주유소에 제안하기 시작했다. 이후 정유사와 주유소의 거래 방식 중 하나로 정착했다.
Q. 주유소는 무조건 사후 정산제 형태로 거래해야 하나?
A. 아니다. 어떤 방식으로 받을지는 주유소가 정할 수 있다. 주유소가 정유사에서 석유 제품을 공급받는 가격은 운송 거리, 계약 조건, 물량 등에 따라 다 다르다. 주유소가 유리한 방식으로 정하면 된다.
사후 정산을 할 때도 월평균 가격, 월말 가격, 월중간 가격, 영업일 5일 기준 가격 등 옵션이 많다. 판매 시점에 바로 정산하는 일일 확정가 방식도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다.
Q. 사후 정산제를 선호하는 주유소도 있나?
A. 주유소 저장고 규모가 작고, 회전율이 빠르고, 현금 흐름이 좋지 않은 주유소에서 사후 정산제를 선호한다고 한다. 유가가 크게 출렁이는 시기엔 월평균 가격으로 사후 정산하는 게 주유소 입장에서도 편할 수 있어서다.
예를 들어 주유소가 매번 입고 물량을 현금 결제하는 경우, 급등한 시기에 산 기름을 하락기에 팔 때 손해를 본다. 월평균 사후 정산으로 계산하면 이런 리스크를 줄일 수 있다.
Q. 주유소 운영자에게 어떤 리스크가 있나?
A. 보통 월 단위로 최종 공급가가 정해지는 만큼 기름값이 크게 오르내릴 때 판매가를 잘못 정하면 손해를 볼 수 있다.
주유소는 기름을 팔고 있는 시점에도 내가 이 기름을 얼마에 샀는지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깜깜이’ 상태로 영업해야 한다. 1700원에 팔고 있는 기름이 나중에 1650원에 정산될지, 1750원에 정산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매입 원가를 모르니 적정 판매가를 정하기가 어렵다.
대부분 주유소는 인근 경쟁 주유소의 판매가를 보고 판매 가격을 결정한다. 주변에 알뜰, 직영 주유소가 있다면 가격 경쟁이 치열하다. 이를 의식해 싸게 팔았다가 나중에 높은 정산가를 통보받으면 적자를 본다. 정유사 영업 사원이 중간에 가격을 알려주지만, 정확하진 않다.
Q. 소비자에게 미치는 영향은?
A. 국제 유가가 내려가는 경우에도 주유소는 나중에 얼마에 정산될지 모르기 때문에 판매가를 즉각 내리지 않고 보수적으로 유지하는 경향이 있다. 거꾸로 국제 유가가 오를 땐 추가 정산을 우려해 판매 가격을 먼저 올리는 요인이 된다. 이번 중동 공습 이후가 대표적인 예다.
Q. 혹시 이런 거래 형태가 불법인 것은 아닌가?
A. 공정거래위원회는 사후정산제를 ‘가격 투명성을 저해하는 불공정 관행’으로 보고 수차례 조사를 진행했다. 그때마다 정유사들은 “경쟁 상황에 따른 유연한 가격 대응을 위한 마케팅 수단”이라고 항변했다. 2013년 사후 정산제가 불공정 거래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오면서 법적 문제는 일단 없는 것으로 판단된 상황이다.
Q. 사후 정산제가 아예 폐지되는 방향으로 논의되고 있는가?
A. 더불어민주당과 정부는 주유소 사후 정산제를 원칙적으로 폐지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오는 8일 3차 회의에서 관행적으로 이어지던 사후 정산제를 폐지한다는 내용으로 최종안이 나올 예정이다.
석유 제품 공급은 정유사와 주유소가 맺은 사적 계약이다. 계약 변경을 원하는 주유소부터 순차적으로 계약 내용을 바꾸면 될 것으로 보인다. 단서 조항을 달아 주유소가 원하는 경우엔 사후 정산제를 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정유업계는 사후 정산제는 고객인 주유소에 더 나은 조건을 제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일 뿐, 당장 없애도 무관하다는 입장이다.
Q. 주유소의 입장은 어떤가?
A. 현재 자영 주유소 대부분이 월평균 가격 사후 정산제로 결제한다. 정유사 영업 사원과의 관계를 고려해 불이익을 볼까 봐 관행적으로 이런 계약을 맺은 곳도 있다고 한다. 처음부터 사후 정산제를 안 하는 게 원칙이 되면, 그간의 거래 관행이 바뀔 가능성이 크다.
다만 모든 주유소가 사후 정산제 폐지에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사후 정산제를 선택해 주변 주유소보다 더 낮은 가격에 기름을 받아가는 주유소들도 있다. 과거에도 사후 정산제 폐지 논의가 나왔으나, 일부 주유소가 반대하면서 무산된 바 있다.
현재 주유소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한국주유소협회는 전국 시도별 지회장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있다. 사후 정산제 문제에 대해 주유소마다 입장이 다르고 계약 조건도 복잡한 게 난제다. 협회에선 다수 주유소 의견을 고려해 사후 정산제는 없애는 게 맞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