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국내 석유화학 기업들에 제시한 사업 재편안 최종 제출 시한인 31일, 울산의 대한유화·SK지오센트릭·에쓰오일과 여수 2호 재편 대상인 LG화학·GS칼텍스가 재편안을 내지 못했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호르무즈발 나프타 공급 충격이 구조조정 논의를 앞당기는 촉매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울산과 여수에서 최종 재편안을 제출하지 않은 표면적 이유는 기업 간 이견이다. 울산에서는 올해 상업 가동을 앞둔 에쓰오일 샤힌 프로젝트를 재편 대상에 포함할지조차 결론을 내지 못해, 사실상 논의의 첫 단추도 끼우지 못했다. LG화학·GS칼텍스는 LG화학 NCC(나프타분해시설) 2호기를 멈추고 합작법인을 설립하는 방안이 유력하게 거론되지만, 자산 가치 평가를 둘러싼 견해차가 좁혀지지 않고 있다. 지분 50%를 보유한 셰브론이 끼어 있는 GS칼텍스의 지배구조도 걸림돌이다.
◇공급 과잉에 나프타 수급난·가격 급등
나프타 쇼크도 영향이 컸다. 지난달 28일 미국·이스라엘의 이란 공습 이후 국내 연간 사용량의 4분의 1을 공급하던 중동산 나프타 조달이 사실상 막혔다. 나프타 가격은 연초 대비 두 배로 급등했고, 높은 값을 치르더라도 물량 확보가 쉽지 않을 정도로 수급이 경색됐다. 기업들은 공해에 떠 있는 러시아산 나프타라도 확보하기 위해 각국 트레이더와 개별 협상을 벌이는 등 당장의 위기를 넘겨야할 상황이다. LG화학은 가동률을 60%대로 낮춘 상황에서도 3~4일치 사용량에 불과한 러시아산 나프타 2만7000t을 확보하기 위해 결제 대금을 디르함화(아랍에미리트의 통화)로 지급하기로 했다. 정부가 나프타 가격 상승분의 50%를 지원하기로 했지만 업계에서는 “충분치 않다”는 반응이다.
원가 급등에도 불구하고 공급 과잉이 이어온 업계 특성상 비용을 고객사에 100% 전가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여기에 국내 플라스틱 제조업체 다수가 “범용 수지 가격 인상을 막고, 국내 석유화학사의 제품 수출도 제한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정부 역시 폴리에틸렌 등 일부 범용 수지에 대한 수출 제한을 검토하고, 매점매석 등 시장 교란 행위에 대해 경고하고 나섰다. 업계 관계자는 “러시아산 나프타라도 확보해 설비 가동일을 하루라도 늘리는 것이 당면 과제가 됐다”며 “최종안 제출까지는 시간이 더 걸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호르무즈 충격이 앞당긴 ‘옥석 가리기’
역설적으로 이번 충격이 구조조정의 강력한 도화선이 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나프타 쇼크를 계기로 경쟁력을 잃은 설비가 먼저 멈추는 ‘옥석 가리기’가 이미 시작됐기 때문이다. 여천NCC는 이란 전쟁 발발 닷새 만에 공급 불가항력을 선언했고, LG화학도 지난 23일부터 여수 2공장 NCC 1기 가동을 중단했다.
글로벌 컨설팅업체 BCG의 백진영 MD파트너는 “국내 석유화학 구조 재편의 핵심은 각사의 비핵심 NCC 설비 가동을 멈춰 에틸렌 생산량을 줄이는 것이었는데, 최근 흐름이 이를 빠르게 현실화하는 모습”이라며 “전쟁발 나프타 위기가 해소되더라도 설비를 다시 돌리기보다는 셧다운한 채 구조조정을 신속히 이행하는 시나리오가 예상된다”고 말했다.
황규원 유안타증권 수석연구원은 “대러 제재 이후 나프타 공급망이 중동으로 편중된 상황에서, 이란이 호르무즈 봉쇄의 효과를 학습한 이상 나프타 조달 차질은 이제 ‘상수’로 봐야 한다”며 “해외 의존도가 높은 기업일수록 이런 리스크를 감안해 구조조정에 나설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