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규 대형 원전 2기와 소형모듈원자로(SMR) 1기 건설을 위한 부지 유치 경쟁에 4개 지자체가 뛰어들었다.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은 지난 1월 30일부터 진행한 신규 원전 건설 후보지 공모에 울산 울주군, 경북 영덕군, 경북 경주시, 부산 기장군이 신청서를 제출했다고 30일 밝혔다. 울주군과 영덕군은 대형 원전, 경주시와 기장군은 SMR 건설 유치를 각각 희망했다. 신규 원전 2기는 역대 33·34번째 원전이 된다. 국내 1호가 될 SMR은 대형 원전 출력의 2분의 1인 소형 원자로로, 공장에서 미리 만들어 현장에서 조립하는 미래형 원전이다. 공기(工期)와 비용을 절감할 수 있고 입지 제약도 적어 AI 시대 전력 공급원으로 기대를 받고 있다.
한수원은 오는 6월까지 기초조사와 현장실사를 마치고, 외부 전문가로 구성된 부지선정평가위원회의 평가와 최종 선정까지 마무리할 계획이다. 부지적정성·환경성·건설적합성·주민수용성에 25점씩 100점 만점으로 평가한다. SMR은 2035년, 대형 원전 2기는 2037~2038년 준공이 목표다.
대형 원전 유치를 신청한 울주군은 새울 원전 유치 경험과 인근 산단의 풍부한 전력 수요가 강점이다. 영덕군은 문재인 정부 때 백지화된 천지 원전의 기존 부지가 남아 있어 유리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SMR 유치를 신청한 경주시와 기장군은 원전과 인연이 깊다. 경주에는 한수원 본사와 월성 원전, 중·저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이 있다. 한수원 주도로 개발 중인 SMR 모델이 채택될 가능성이 커 유리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고리 원전이 있는 기장군은 원전 관련 인프라가 SMR과 연계에 적합하다는 평가다.
◇이란 사태로 원전 중요성 더 커져… 국내 첫 SMR 2035년 가동 목표
신규 원전 부지 유치 경쟁 대진표가 완성되면서 한국 원전 산업의 시계가 다시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AI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산업 성장, 전기차 보급 확대에 따른 전력 수요가 폭증하고 있고, 중동 전쟁 확전 우려에 따른 에너지 안보 위기까지 맞물리며 ‘원전 적기 건설’은 국가적 생존 과제로 떠올랐다.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은 이번에 원전 유치를 신청한 4개 지자체에 대한 부지 조사를 상반기 중 끝낸다는 방침이다. 최종 선정도 6월 말에 마무리될 전망이다. 이후 대형 원전은 2029년까지 환경영향평가와 건설 허가 신청 등을 하고, 2037~38년 상업운전에 착수한다는 계획이다. SMR은 2028년까지 표준설계인가를 취득하고 2030년까지 건설 허가를 확보한 뒤, 2035년 가동에 들어갈 예정이다.
원전을 최종 유치하는 지자체는 정부에서 발전소 주변 지역 지원에 관한 특별법에 따른 지원금을 받아 지역 발전에 쓸 수 있다. 건설비의 2% 수준에서 일회성으로 주는 ‘특별 지원금’은 도로나 항만 등 지역 개발 사업에 투입되고, 발전량을 기준으로 60년(SMR은 80년)간 매년 지급되는 ‘기본 지원금’과 ‘사업자 지원금’은 주민 복지나 장학금, 의료·문화 관련 시설 등에 쓰인다. 지방세법에 따라 발전소가 해당 지역에 내는 ‘지역 자원 시설세’도 있다.
이번에 부지 공모를 받은 신규 원전들은 지난해 초 여야 합의로 확정한 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11차 전기본)에 포함된 것이다. 한수원은 당초 작년 7월 건설 부지 선정 공고를 낼 예정이었으나, 현 정부 출범과 함께 모든 절차가 중단됐다. 이후 대국민 여론조사에서 ‘원전 건설’ 찬성 여론이 압도적으로 나온 덕에 올해 1월부터 부지 선정 절차를 다시 추진할 수 있게 됐다.
전문가들은 “전 세계 주요국들은 최근 앞다퉈 원전 확충에 나서고 있다”며 “한국도 추가적인 원전 건설이 뒤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11차 전기본에서 신규 원전 건설을 확정했더라도 올해부터 2040년까지 15년의 전력 청사진을 담은 12차 전기본에서 방향을 틀면 그 이후 원전 건설은 멈추게 된다. 현재 12차 전기본 준비위원회 79명 가운데 재생에너지 시민단체 출신이 6명인 반면 원전 전문가는 1명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우려가 나온다.
◇탈원전 선언했던 나라들도 돌아섰다
이란 전쟁을 계기로 에너지 안보 문제가 다시 부각되면서 탈원전을 선언했던 국가들은 잇달아 급선회를 하고 있다. 지난 21일 대만 라이칭더 총통은 구오성 원전과 마안산 원전 재가동을 위한 승인 절차에 착수했다고 발표했다. 대만은 2017년 탈원전 정책을 법제화하고 가동 중이던 모든 원전을 차례로 멈춰왔는데, 이를 9년만에 뒤집은 것이다. 같은 날 스위스 상원은 신규 원전 건설 금지 조치를 해제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대만은 마안산 원전 가동 중단으로 독일, 이탈리아에 이어 세 번째 탈원전 국가가 됐지만 이란발 호르무즈 봉쇄 위기로 LNG 수입 의존 구조의 취약성이 드러나자 극적인 방향 전환을 택했다. 세계 최대 파운드리 기지를 지탱할 전력을 원전 없이는 확보하기 어렵다는 현실론이 탈원전 이념을 밀어낸 것이다. 스위스도 2017년 국민투표로 신규 원전 건설을 금지했다가 9년 만에 유턴한 것이다.
최근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은 과거 유럽의 탈원전 기조가 “전략적 판단 착오였다”고 인정하며 재생에너지와 원전을 결합한 전력 시스템 구축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탈리아는 40년 만에 원전 재도입 논의를 시작했다.
◇“12차 전기본에도 신규 원전 담아야”
전문가들은 세계 최대 원전 시장인 미국을 포함해 글로벌 원전 시장의 르네상스를 놓치지 않으려면 국내 원전 생태계가 탄탄해야 한다고 말한다. 재생에너지 확대 못지않게 신규 원전과 SMR에 대한 전향적 검토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글로벌 원전 르네상스에서 한국만 소외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은 이미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지난 19일 미·일 정상회담 이후 일본은 730억달러(약 108조원) 규모의 대미 투자 2차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이 중 SMR 사업 규모만 400억달러(약 60조원)로, GE 버노바와 히타치가 미국 테네시·앨라배마주에 건설할 계획이다. 지난 14일(현지 시각) 로이터에 따르면 미 원전 업체 웨스팅하우스(WEC)의 댄 리프먼 글로벌 비즈니스 이니셔티브 부문 사장도 “미국과 일본이 WEC 및 일본 원자력 설비 기업들이 참여할 공동 원전 프로젝트에서 역할 분담에 합의했다”고 밝혔다. 국내 원전 업계 관계자는 “공급망 핵심 분야에서 일본이 먼저 자리를 잡는 것 아니냐는 불안이 있다”고 말했다.
최성민 카이스트 교수는 “원자력은 핵연료를 수년간 저장할 수 있고, 전체 가격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10% 이하로 낮아서 에너지 안보 위기 상황에서 버틸 수 있는 근간이 된다”며 “과거 석유 파동 이후 원자력에 투자해 산업화의 기초를 마련했던 것처럼 이번 에너지 안보 위기 역시 원자력을 방파제로 활용해 이겨내야 한다”고 말했다.
정범진 경희대 교수는 “신규 원전을 건설할 때마다 후보 부지 신청서를 두 달 동안 받은 후 평가위원회를 거치는 작업을 반복하는 속도로는 전력 수요 급증과 에너지 안보 위기의 파고에 빨리 대응할 수 없다”며 “정부 평가를 한 번이라도 통과한 지자체는 잠재 후보지 리스트에 보관하고, 추후 신규 원전 건설 때 ‘패스트 트랙’으로 지정하는 정책적 의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