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주 가치 제고가 화두로 떠오르면서 기업 최고 의사 결정 기구인 이사회 수장을 외부 인사로 채우는 ‘사외이사 의장’ 바람이 재계를 휩쓸고 있다. 그런데 이 자리에 누구를 앉히느냐를 보면 각 그룹의 경영 철학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LG는 ‘교수단’, 삼성은 ‘경제 관료’, SK는 ‘계열사 맞춤형’을 택했다. 4대 그룹 중 유일하게 현대차만 총수·CEO가 의장을 겸직하는 체제를 고수하고 있다.
◇삼성은 ‘관료’, SK는 ‘맞춤형’
삼성은 ‘경제 관료’ 선호가 뚜렷하다. 신제윤 전 금융위원장(삼성전자)을 비롯해 최중경 전 지식경제부 장관(삼성물산), 유일호 전 경제부총리(삼성생명), 최종구 전 금융위원장(삼성전기) 등 정통 엘리트 관료 출신들이 계열사 이사회 의장을 맡았다. 재계에선 삼성 이사회 의장의 역할이 ‘전략 제안자’보다는 ‘재무·법률 리스크’를 보완할 전문가에 가깝다고 본다. 기술과 사업은 사내 이사가 챙기되, 금융·규제·투자자라는 세 축을 동시에 다룰 수 있는 베테랑에게 이사회 수장을 맡기는 설계다.
자율을 중시하는 SK는 ‘계열사별 맞춤형’ 구조다. SK㈜ 의장에 매일유업 현직 CEO(최고경영자)인 김선희 의장을 앉힌 것이 대표적이다. ‘현장에서 뛰는 경영자가 경영진을 감독해야 한다’는 파격적인 실험이다. SK하이닉스는 고승범 전 금융위원장을 의장으로 선임했다. 미국 증시 ADR(주식예탁증서) 상장과 용인 클러스터 투자금 확보와 같이 수백조 원에 달하는 초대형 자본 조달을 앞둔 배경이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대규모 해킹 사태로 고전해 온 SK텔레콤은 판사 출신 정재헌 CEO를 선임한 데 이어, 이사회 의장에도 서울고등법원장을 지낸 김창보 대륙아주 변호사를 선출했다.
LG그룹은 최근 지주사인 ㈜LG와 LG전자, LG화학 등 상장사 11곳 모두를 ‘사외이사 의장 체제’로 바꿨다. 그런데 의장 11명 전원이 현직 교수다. 구광모 회장 후임으로 ㈜LG 이사회 수장에 오른 박종수 의장은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다. LG전자와 LG이노텍도 각각 강수진·이희정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를 의장으로 선출했다. LG유플러스(남형두 연세대 교수), LG CNS(이호영 한양대 교수)까지 합치면 11명 중 5명이 법대 교수다.
나머지 계열사도 경영학(LG디스플레이·LG생활건강·HS애드), 정치외교학(LG화학), 기업산학연협력센터(LG에너지솔루션), 전자공학(LG헬로비전) 교수 등이 포진했다. 재계에선 보기 드문 ‘교수 의장단’이다. LG 측은 “이사회 독립성을 강화해, 투명한 경영 체제를 확립하려는 취지”라고 밝혔다. 다만 로봇·인공지능(AI)·이차전지 등과 같은 기술 중심의 주력 계열사 이사회 의장의 상당수가 문과(文科) 교수라는 점에서 자칫 현장감이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현대차는 ‘CEO 의장’으로 신속 결정
현대차그룹은 4대 그룹 중 유일하게 총수나 CEO가 이사회 의장을 겸직하는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정의선 회장이 현대차 의장을 맡고 있고, 기아(송호성 대표이사), 현대모비스(이규석 대표이사), 현대제철(이보룡 대표이사) 등 주요 계열사도 CEO의 겸임 체제다.
재계에선 ‘속도 경쟁’이 치열한 모빌리티 업계 특성상 현대차가 ‘경영자 주도의 빠른 전략 실행’에 방점을 둔 것으로 해석한다. 현대차는 지난해 트럼프 정부 초기 210억달러(약 31조9000억원) 대미(對美) 투자를 선제적으로 발표했고 외국인 연구개발(R&D) 수장 선임, 새만금 9조원 투자 등 주요 국면마다 빠른 결정으로 주목 받았다.
현대차는 이사회 독립성 우려를 의식해 지난해 ‘선임 사외이사’ 제도를 도입했다. 사외이사 대표 격인 선임 사외이사가 별도 회의를 주재하고 경영진에 자료를 요청할 권한을 갖게 함으로써 견제와 균형을 꾀한다는 전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