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5일 한국GM 부평공장 내 프레스공장. 헥터 비자레알 한국GM 사장은 노조와 공동으로 진행한 행사에서 제너럴모터스(GM) 본사의 대규모 투자 계획을 전하며 이 같이 말했다. 지난해 12월 한국 사업장에 3억달러(약 4500억원)을 투자하겠다고 했던 GM은 이날 추가로 3억달러를 더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8년 전인 지난 2018년만 해도 한국GM의 운명은 ‘풍전등화(風前燈火)’ 상태였다. 유럽과 인도,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에서 잇따라 철수하며 글로벌 사업을 재편하던 GM은 한국 사업장마저 구조조정 대상에 올렸다. 정부와 산업은행이 8100억원의 공적자금을 투입하기로 하면서 철수 위기는 넘겼지만, 22년 넘게 운영했던 군산공장은 결국 문을 닫았다.

당시 산업은행이 자금 지원을 결정하면서 GM에 요구한 조건은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크로스오버유틸리티차량(CUV)의 생산에 개발 권한까지 달라는 것이었다. GM은 현대차와 기아자동차(현 기아), 옛 대우자동차 등 자체 완성차 브랜드를 가진 한국의 기술력과 풍부한 인적 자원, 협력업체 인프라 등을 고려해 한국GM에 소형 SUV의 개발 전권을 줬다.

완성차 업계 관계자는 “GM이 ‘R&D 물량을 10년 동안 유지하고, 생산·R&D 법인은 그 이상 지속 가능하도록 노력하겠다’고 산업은행에 약속한 것도 한국 경쟁력을 인정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한국GM이 개발하고 생산한 쉐보레 트랙스 크로스오버와 트레일블레이저는 현재 북미 시장을 휩쓸고 있다.

한국GM을 비롯한 국내 자동차 중견 기업들이 위기를 딛고 반등에 성공하며 한국 제조업의 저력을 증명하고 있다. 수십년간 축적한 차량 개발 노하우와 탄탄한 부품 공급망, 뛰어난 품질 관리 등이 주효했다는 분석이다.

GM 한국사업장 인천 부평공장 내 프레스 공장에서 열린 생산 시설 현대화 축하 행사에서 (앞줄 왼쪽부터) 헥터 비자레알 GM 한국사업장 사장 겸 CEO(9번째), 안규백 전국금속노동조합 한국지엠지부장(8번째) 등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한국GM 제공

◇ 한국GM, 엔지니어만 3000명… 부품 공급망도 한국의 저력

지난 2014년부터 2021년까지 8년 연속 적자를 냈던 한국GM은 2022년 흑자로 전환했고 3년 연속 순이익을 내며 GM의 ‘효자’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2024년에는 2조2077억원에 이르는 순이익을 기록하면서 사상 최대 실적을 냈다.

지난 2월 메리 바라 GM 회장은 한국 생산 모델을 콕 집어 “큰 성공을 거뒀다”고 말했다. 트랙스 크로스오버는 미국 소형 SUV 시장에서 지난해 점유율 27%를 기록하며 전체 차종 중 1위를 기록한 바 있다.

문을 닫을 위기까지 몰렸던 한국GM이 반등한 데는 자체 개발 역량이 큰 역할을 했다. 8년 전 GM 본사는 한국 사업장을 유지하면서 제품 개발과 생산 조직을 분리했다. 현재 GM그룹 내에서 두 번째로 큰 글로벌 엔지니어링 센터인 GM테크니컬센터코리아가 당시 출범한 제품 개발 전담 조직이다.

그래픽=정서희

트랙스 크로스오버와 트레일블레이저는 GM테크니컬센터코리아에서 최초 제품 기획부터 디자인, 성능 개발 등 모든 제작이 이뤄졌다. 한국GM은 트랙스 크로스오버와 트레일블레이저에 2020년부터 2023년까지 역량을 총동원했다. 이들 차량의 개발과 생산설비 개조 등에 투입된 자금만 22억달러 규모다. 당시 환율로 환산하면 3조원에 달한다.

한국GM 고위 관계자는 “현재 엔지니어만 3000명”이라며 “한국처럼 디자인 스케치부터 생산, 품질 관리까지 전 과정을 전담할 수 있는 역량을 보유한 곳은 많지 않다”고 했다.

한국의 탄탄한 부품 공급망도 한국GM이 일어설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 꼽힌다. 한국GM의 1차 협력사는 1600개 이상이다. 이들과 함께 만든 부품은 연간 약 37억달러(약 5조6000억원) 규모로 전 세계 시장에 공급되고 있다.

김경유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자동차 모든 부품을 값싸게 주변에서 구매할 수 있는 국가는 극소수”라며 “GM이 한국에서 공장을 철수할 수 없다고 결론 내린 것도 바로 탄탄한 부품 공급망이라는 한국 자동차 산업의 강점 때문”이라고 말했다.

◇ “부산 공장이 품질 1등”… 르노, KGM도 세계로

역시 어려움을 겪은 바 있는 르노코리아와 KG모빌리티(옛 쌍용자동차)도 국내외에서 존재감을 확대하고 있다.

르노코리아는 지난 2020년 소형 SUV인 XM3를 출시한 이후 신차를 내놓지 못해 그룹 내에서 존재감을 잃고 있었다. 그러나 본사를 설득한 끝에 기술과 생산력 등을 갖춘 한국에서 3종의 신형 SUV 개발과 생산을 맡기로 합의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여명’이란 뜻의 ‘오로라 프로젝트’다.

르노코리아는 지난 2024년 오로라 프로젝트의 첫 번째 작품인 중형 SUV 그랑 콜레오스를 출시했다. 이 차는 2년 간 누적 판매대수 약 5만대를 기록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올해 출시한 준대형 쿠페형 SUV인 필랑트 역시 순항 중이다.

르노코리아가 르노그룹의 중대형차 생산 기지로 낙점된 비결로는 품질 관리가 꼽힌다. XM3의 유럽 전략형 모델인 아르카나가 2021년부터 안정적으로 공급된 점에서 점수를 얻은 것으로 전해졌다.

르노코리아 관계자는 “본사가 매년 전 세계 르노 공장의 생산 품질을 평가하는데, 부산 공장은 한때 1위를 차지하는 등 매번 3위 안에 든다”며 “품질 측면에서는 압도적”이라고 말했다.

기업회생 절차만 두 번을 겪었던 KGM도 지난해 수출량이 전년 대비 12.7% 증가한 7만286대를 기록하며 반등하고 있다. KGM 관계자는 “수십년 간 A부터 Z까지 모든 것을 스스로 개발하면서 축적한 노하우를 갖고 있었다”며 “임금 반납, 복지 축소 등을 감내하며 개발비를 마련한 직원들의 절박함도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KGM의 반등을 견인하고 있는 주력 모델은 중형 SUV인 토레스와 쿠페형 SUV 액티언, 중형 픽업트럭 무쏘 등이다. 과거 쌍용차 시절부터 ‘SUV의 명가(名家)’로 꼽히며 주로 SUV 개발과 생산에서 오랜 기간 경쟁력을 축적해온 점이 최근 선보인 신차들이 성공적으로 글로벌 시장에 안착하는데 발판이 됐다.

KGM은 중국 최대 전기차 제조사인 BYD와 손잡고 전기차 배터리를 조달하는 한편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공동 개발하고 있다. 고성능 하이브리드차, 전기차 전용 T2X 플랫폼 등의 기술을 갖춘 중국 체리자동차도 KGM과 차세대 친환경차, SUV 개발에 나섰다.

완성차 업계 관계자는 “KGM이 중국의 유명 전기차 제조사들과 파트너십을 체결한 것은 오랜 SUV 개발·생산 경험을 바탕으로 디자인과 성능에서 충분한 경쟁력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적극적으로 해외 시장의 문을 두드려온 점도 KGM의 반등 이유로 꼽힌다. KGM은 기업 회생을 두 번 겪으면서 빠져나간 직원들의 빈자리를 현대차 등에서 활약하던 영업통으로 채우고, 튀르키예와 중동 등 새로운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현대차 러시아·영국법인장을 역임한 황기영 KGM 대표이사 부사장이 대표적이다.

르노코리아 부산공장 전경. /르노코리아 제공

◇ 급한 불 끈 중견 3사… 비용 경쟁력 확보 필요

자동차 업계에서는 중견 3사가 위기를 벗어난 만큼, 이제 미래를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생산 비용 절감이 급선무다. 한국 자동차 최대 수출 국가인 미국이 한국산 자동차에 15% 관세를 매기기 시작했고, 이 외 시장에선 중국 자동차 업체들과 경쟁해야 한다.

김 선임연구위원은 “관세와 중국 등에 대응하려면 국내 생산 비용을 낮춰야 한다”며 “중견 3사는 스마트 제조 등을 통해 비용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항구 한국자동차연구원 연구위원은 “고임금 구조를 개편할 필요가 있다”며 “지금처럼 어렵고 복잡한 환경이 없었던 만큼, 회사와 노조가 허심탄회한 협상을 통해 조금씩 양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기차 등 미래 기술 확보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오로라 프로젝트 세 번째 모델로 전기차를 준비하고 있는 르노코리아를 제외하면 한국GM과 KGM 모두 주력 모델은 내연기관차에 쏠려 있다. KGM의 경우 친환경차 사업을 위해 BYD와 체리 등 중국 업체들과 손잡고 있지만, 장기적으로 ‘홀로서기’를 위해선 독자 기술 역량에 더 많은 투자를 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김 선임연구위원은 “중견 3사의 경우 여전히 독자적으로 전기차와 같은 미래 대비를 못하고 있어 완전히 안정됐다고 보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