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10년 가까이 국내 자동차 시장은 SUV가 지배했다. 차체 높이 덕분에 시야가 확보돼 운전이 편안하고 공간이 넉넉한 강점이 실용성을 추구하는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최근 SUV의 범람 속에서 이 시장이 성숙하면서 균열도 생겼다. ‘공간은 있는데 승차감이 아쉽다’ ‘장거리 타면 피곤하다’는 불만이 쌓이기 시작한 것이다. 주행 감각에서도 세단보다 한 발 뒤처진다는 약점이 불편한 소비자도 적잖다.
르노코리아가 올해 초 출시한 필랑트(FILANTE)는 이 틈새를 정확히 겨냥한다. 필랑트는 세단과 SUV의 특징을 결합한 크로스오버 모델로, 프랑스어로 ‘별똥별’(étoile filante)에서 이름을 따왔다. 1956년 프랑스 르노가 항공기 엔진을 탑재해 공개한 실험용 차 ‘에투알 필랑트’의 유산을 잇겠다는 뜻이다. 지난해 인기를 끈 ‘그랑 콜레오스’의 뒤를 이어 올해 한국 시장을 공략하기 위한 신차다.
필랑트는 전장 4915㎜, 전폭 1890㎜에 전고 1635㎜로 제네시스 GV70과 비슷한 덩치다. 같은 플랫폼을 공유하는 그랑 콜레오스보다 차체는 한 체급 더 크지만, 차 높이는 더 낮다. 보통 SUV는 뒷좌석 공간과 짐칸을 넓게 쓰기 위해 차 지붕을 높게 올리는 방향으로 설계된다. 그러나 지붕이 높을수록 차의 무게중심도 올라가서 커브를 돌거나 바람이 불 때 차체가 기우는 느낌이 커진다. 반면, 필랑트는 차체를 낮고 길게 뽑아 무게중심을 최대한 아래로 내렸다. 네 바퀴 사이의 간격인 휠 트랙도 넓혀 코너에서 차가 버티는 힘을 키웠다. 겉모습은 크로스오버지만, 움직임의 지향점은 세단에 가깝다.
이러한 방향성은 서스펜션, 즉 차의 충격 흡수 장치 세팅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필랑트에는 ‘주파수 감응형 댐퍼(SFD)’가 적용됐다. 댐퍼란 노면의 충격이 차체로 전달되는 것을 줄여주는 장치다. 댐퍼를 딱딱하게 세팅하면 승차감이 나빠지고, 부드럽게 하면 차가 너무 흔들리곤 했다. 대신 르노는 SFD를 통해 주행 속도와 노면 상태를 실시간으로 감지해 댐퍼 강도를 자동으로 조절한다. 저속 구간에서는 단단하게 차체를 붙잡아 코너링 안정성을 높이고, 고속 구간에서는 부드럽게 풀어 장거리 피로를 줄이는 방식이다.
뒷바퀴 쪽에는 ‘멀티링크 서스펜션’이 적용됐다. 네 바퀴가 각각 독립적으로 노면 충격을 흡수하는 구조로, 한쪽 바퀴가 과속방지턱을 넘어도 반대쪽 바퀴에 충격이 전달되지 않는다. 이 두 가지 조합이 크로스오버 차체에서 세단 수준의 승차감을 만들어내는 핵심이다.
파워트레인은 르노의 ‘E-Tech 풀 하이브리드’ 시스템이다. 가솔린 엔진 혼자 달리는 게 아니라, 전기 모터가 함께 힘을 보태는 방식이다. 출발할 때는 전기 모터가 먼저 치고 나가기 때문에 가속 페달을 밟는 즉시 반응이 온다. 엔진이 개입하는 시점도 자연스러워서 변속 충격이 거의 없다. 복합연비는 L(리터)당 17.5㎞ 수준으로, 준중형 SUV치고는 효율이 높은 편이다. 전기 모터의 역할이 많은 만큼 정숙하다. 도심 저속 구간에서는 엔진이 꺼지고 전기 모터만으로 달리는 시간이 많아 실내가 조용하다. 여기에 ‘액티브 노이즈 캔슬레이션(ANC)’이 더해진다.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과 같은 원리다. 차에 달린 마이크가 엔진 소리나 타이어 소음을 감지하면, 스피커가 그 소리를 상쇄하는 반대 음파를 내보내 소음을 지운다. 앞 유리와 앞좌석 옆 유리는 이중 접합 유리를 써서 외부 소음 차단을 한 번 더 강화했다. 고속도로에서 장시간 이동할 때 귀가 덜 피로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