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서울 중구 코리아나호텔에서 열린 고려아연 제52기 정기 주주총회 전경./고려아연

지난 24일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주주총회에서는 기존 ‘2년 이내’였던 이사 임기를 ‘3년’으로 늘리는 안건이 69.8% 찬성률로 통과됐다. 특별결의 사안인 정관 변경 건이라 출석 주주 의결권의 3분의 2 이상 찬성을 확보해야 하는데, 겨우 3.2%포인트 차로 넘겨 턱걸이를 한 것이다. 회사 측은 “이사회 운영의 안정성 강화”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시민단체 경제개혁연대 등은 “이사 수를 줄여 소수 주주의 이사회 진입 가능성을 낮추려는 조치”라고 비판했다. 결과적으로 30% 넘는 주주가 회사 측 명분에 동의하지 않은 셈이다.

금융 당국이 이달 1일부터 주주총회 표결 결과를 세부 수치까지 전면 공개하도록 규정을 바꾸면서, 올해 주총 풍경이 달라졌다. 작년까지는 ‘원안대로 의결’ 혹은 ‘부결’ 한 줄로 끝났던 공시가, 이제는 안건별 찬성·반대 비율이 소수점 단위까지 낱낱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가결’과 ‘부결’ 두 글자로 뭉뚱그려졌던 과거 주총과 달리, 이제는 회사와 경영진에 대한 주주들의 표심이 수치로 고스란히 드러나면서 기업들은 전에 없이 긴장하고 있다.

그래픽=김현국·midjourney

◇“부결보다 무서운 60%대 성적표”

올해 주총에서 기업들을 가장 오싹하게 만든 숫자는 60%대 찬성률이다. 상법 개정 취지를 우회한다는 비판을 받아온 ‘이사 임기 연장’ 안건들이 특히 타깃이 됐다. 국민연금이 이런 안건에 대해서는 ‘반대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히자, 그 여파가 수치로 명확히 나타났다.

신세계의 경우 보선(補選) 이사 임기 변경 안건이 찬성 71.8%로 겨우 문턱을 넘었다. 효성중공업은 이사 정원 축소 안건이 찬성률 58.8%에 그쳐 결국 부결됐다. 기업들 사이에서는 “부결보다 더 무서운 게 60%대 찬성”이라는 반응이 나온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숫자가 공개되는 순간 주주들의 지지도가 성적표처럼 박제된다”며 “70% 수준으로 통과했다는 건 뒤집어 말하면 주주의 30%가 공개적으로 반대했다는 의미여서 향후 경영에 상당한 부담이 된다”고 했다. 재계의 한 그룹 관계자는 “통과되고도 패배한 기분”이라고 말했다.

18일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수원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제57기 삼성전자 정기주주총회에서 주주들이 주주 확인을 하고 있다./연합뉴스

이사 보수 한도 승인 안건 투표에서도 진땀을 흘린 기업이 적잖았다.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 측과 2대 주주 호반그룹 간 지분 격차가 1.78%포인트까지 좁혀진 상태에서 열린 26일 한진칼 주총에선 이사 보수 한도 승인 안건이 찬성률 71.7%를 기록했다. 앞서 조 회장 선임 안건이 93.8%의 높은 찬성률로 무난히 가결된 것과 대조적이었다. 한진과 호반 간 표 대결이 첨예한 상황에서 조 회장을 압도적으로 지지한 주주들도 반대표를 던진 결과였다. 대법원이 경영진의 보수 셀프 승인에 제동을 걸면서 대주주 의결권이 제한되자, 소액 주주들의 입김이 숫자로 증명된 것이다. 효성중공업은 69.3% 찬성률로 간신히 보수 한도를 승인받았고 한국항공우주(73.6%), 한화비전(76.1%) 등도 고전했다.

◇정밀한 ‘표 대결’ 데이터 될 듯

이사 선임 때는 후보별 찬성률이 공개되면서 누가 주주의 신임을 얻고 신뢰를 얻지 못하는지가 즉각 드러났다. LG생활건강이 상정한 한 감사위원 선임 안건은 69.7%라는 낮은 찬성률을 기록해, 주주 셋 중 한 명꼴로 반대표를 던졌음이 확인됐다.

이번 표결 결과 공시는 행동주의 펀드와 소수 주주들에게 다음 주총을 위한 정밀한 ‘표 계산’ 자료가 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어느 안건에 얼마만큼의 반대 표심이 잠복해 있는지를 수치로 파악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특히 내년 주총부터는 특정 안건에 표를 집중시킬 수 있는 집중투표제와 전자 주주총회 의무화가 적용돼, 수 싸움은 더욱 치열해질 전망이다. 재계 관계자는 “앞으로는 낮은 찬성률이 예상되는 민감한 안건은 상정 자체를 포기하는 사례도 늘어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