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석유화학 업계 1·2위인 LG화학과 롯데케미칼이 고객사에 에틸렌과 고부가 합성수지(ABS) 등 주요 소재의 ‘공급 불가 가능성’을 최근 통보했다. 각종 비닐봉투에서 자동차 내장재에 이르는 거의 모든 플라스틱 제품에 쓰이는 원료를 공급 중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양사는 나프타 수급 불균형을 이유로 들며 제품 가격을 최대 60% 인상한 것으로 알려졌다.
나프타는 원유 정제 과정에서 추출되는 석유화학의 기초 원료로, 플라스틱·합성섬유·합성고무·의약품 등 사실상 모든 공산품 제조의 출발점이다. 그런데 세계 나프타 물량의 약 45%가 통과하는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길어지면서 그 수급이 막히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화학산업협회에 따르면, 올해 1월 t당 595달러였던 나프타 가격은 지난 20일 1141달러로 뛰었고, 에틸렌도 705달러에서 1425달러로 폭등했다. 석유화학업계의 한 관계자는 “석유화학 제조사의 나프타 재고량은 기껏 2주일 치밖에 없다는 이야기가 나온다”고 말했다.
◇중소기업의 생산 라인 속속 중단
석유화학발 위기는 산업계 전반으로 번지고 있다. 가장 타격이 빨리 온 건 포장재 분야다. 업종을 불문하고 모든 완제품에 쓰이는 포장재와 용기 수급이 어려워지면서, 내용물을 만들어도 팔 수가 없는 상황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두부 제조업체 강릉초당두부는 최근 용기·비닐 납품 업체 3곳으로부터 “물량을 맞추기 어렵다”는 통보를 받았다. 일부 용기는 재고가 2~3개월 치에 불과해 신규 거래처 확보를 검토 중이지만 업계 전반이 같은 상황이어서 여의치 않다.
경기 이천의 한 포장재 제조 공장은 이미 가동률이 반 토막 났다. 늘 100t 수준을 유지하던 원자재 창고엔 10t 남짓한 폴리에틸렌(PE) 포대 몇 개만 덩그러니 남았다. 대표 황모씨는 “원료값이 한 달 새 t당 100만원 가까이 치솟은 것도 문제지만, 돈을 줘도 물건을 구할 수가 없다”며 “다음 달엔 공장을 셧다운(가동 중단)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대형 식품사인 농심과 삼양 등은 “상반기까지는 재고를 확보했다”는 입장이지만, 납품 업체들의 가격 인상 압박과 공급 차질 우려에 노심초사하고 있다. 화장품 업계 역시 용기 재고가 바닥을 드러내며 생산 차질이 가시화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포장재가 없으면 내수든 수출이든 물류 자체가 멈춘다”고 말했다.
섬유·의류 업계도 위기다. 국내 섬유업계에 따르면 중국의 원사와 화학섬유 업체들이 최근 연이어 최대 50% 인상을 통보하고 있다. 한 섬유 제조사 관계자는 “마진이 5~10%인데, 원가 인상을 받아들일 수 없어 재고로 버티는 중인데 길어야 2~3주 재고밖에 없는 한계 상황”이라고 했다.
국내 산업계에선 ‘4월 중소기업 연쇄 셧다운’ 위기설이 나오고 있다. 자금력이 약한 영세·중소기업들은 애초에 재고량이 넉넉지 않은 상황인데, 석유화학 회사의 남은 물량을 중견·대기업들이 비싼 가격에 싹쓸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프라스틱공업협동조합연합회 관계자는 “4월부터 생산 중단이 현실화되고, 종량제 봉투, 식품 포장용기 등 생활 필수품이 공급 차질을 빚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차량 내장재 대부분이 플라스틱 수지로 만들어진 자동차 업계도 긴장하고 있다. ABS와 같은 주요 소재의 공급이 불안해지거나 물량 확보에 실패하면 자동차 생산 차질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현대자동차 등 완성차 업체들은 1·2차 협력사의 석유화학 원료 재고량을 긴급 점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업계는 ‘에틸렌 비상등’이 켜졌다. 선박 건조 과정에서 두꺼운 철판을 절단할 때 산소와 에틸렌을 함께 태워 만든 고온의 불꽃으로 철을 자른다. 에틸렌이 필수라는 얘기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정부에 우선 공급을 요청한 상태”라고 했다.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의 반도체 공장의 경우 헬륨 부족 사태를 걱정하고 있다. 나프타 부족이 모든 산업계의 아킬레스건으로 등장한 것이다.
◇항공사는 ‘비상 경영’
제조업이 원료 수급에 신음한다면, 항공·운송업계는 치솟는 기름값이라는 ‘비용 폭탄’을 맞았다. 항공유 가격 급등은 즉각적인 노선 감축과 물류비 상승으로 이어져 산업계의 또 다른 악재가 되고 있다.
저가항공사(LCC) 에어부산은 다음 달 부산~괌, 부산~세부, 부산~다낭 등 국제선 3개 노선을 운항하지 않기로 했다. 에어로케이항공은 청주~울란바토르 등 국제선 일부 운항을 축소할 예정이다. 국내 LCC 2위인 티웨이항공은 비용 절감을 위한 비상 경영 체제에 돌입했다. 항공사 영업 비용의 약 30%를 차지하는 항공유의 가격이 급등한 탓이다. 대기업인 대한항공 등은 항공유 부담을 유류 할증료 인상분으로 상쇄하면서 버티지만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국내 건설 경기 불황기에 중동발 악재를 맞은 건설업계도 비용 절감에 비상이 걸렸다. 샷시·단열재·접착제 등 주요 자재의 가격이 모두 석유화학 제품과 연동된 구조이기 때문이다.
정부는 이르면 이번 주 중 나프타 수출 제한 조치를 발표하고, 기업의 러시아산 나프타 대체 계약도 지원한다는 방침이다. 다만 국내 나프타 수출량이 전체 생산량의 10% 수준에 그쳐 이 조치만으로 단기 수급을 안정시키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게 업계의 공통된 시각이다. 자칫 쓰레기 대란도 우려된다. 기후에너지환경부는 전국 지자체를 상대로 종량제 봉투 재고 전수조사에 착수했다. 업계는 현재 재고를 한 달 치로 추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