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해운사인 스위스 MSC가 한국 장금상선그룹의 유조선 사업 지분 50% 인수를 추진한다. 양사가 50대 50으로 공동 경영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장금상선그룹은 올들어 초대형 원유 운반선(VLCC·Very Large Crude Carrier) 30척 이상을 사들이며 세계 최대 VLCC 운용사로 올라서는 등 공격적인 행보를 보여왔다. 최근 이란 사태로 원유 수송에 차질이 빚어지자 이를 일종의 ‘저장 시설’로 대여하는 사업을 펼쳐, 외신으로부터 “한국의 은둔형 해운 사업가가 이번 혼란의 큰 승자 중 한 명”이란 평가를 받는 등 주목받아 왔다.
양사간 거래가 주요국의 결합 심사를 통과할 경우, MSC의 막강한 자본력과 글로벌 네트워크, 장금상선그룹의 공격적인 선대 확장이 합쳐져 글로벌 해운 시장의 질서를 뒤흔드는 ‘게임 체인저’가 될 것이란 평가가 나온다.
◇장금상선, 올들어 공격적 선대 확장
20일 해운업계에 따르면, 그리스와 키프로스 규제 당국은 최근 MSC그룹의 자회사 SAS LUX가 장금상선그룹의 유조선 부문 계열사 장금마리타임의 지분 50%를 인수하는 기업 결합 공시를 발표했다. 나머지 지분 50%는 장금상선 오너 일가가 보유해 회사를 공동 경영하는 구조다.
1989년 설립된 장금상선은 자산 19조여 원 규모의 재계 32위 그룹이다. 컨테이너선과 유조선 사업이 주력이다. 한국과 중국 해운사가 합작 설립한 장금유한공사(시노코)가 모태로, 정태순 회장이 그룹을 이끌고 있다. 주력 컨테이너선사인 장금상선은 시노코가 지분 82%, 정 회장이 18%를 보유하고 있다. 시노코는 정 회장이 지분을 전량 보유하고 있다. 2008년 장금마리타임을 설립했다.
장금마리타임은 최근 1~2년 새 공격적인 선박 매입을 통해 VLCC 시장에서 주목을 받아왔다. 올해 들어서만 중고 VLCC 30척 이상을 추가 매입했는데, 척당 가격이 6000만~7000만달러(약 900억~1000억원)다. 단기간에 4조원에 육박하는 자금을 투입한 셈이다.
현재 VLCC 약 130척을 운영하는 장금마리타임의 유조선 시장 점유율은 17% 수준으로 추산된다. 러시아·이란·베네수엘라 원유를 불법 운송하는 소위 ‘그림자 선단(shadow fleet)’을 제외하면, 점유율이 25% 수준에 달한다는 평가가 나온다. 유조선 업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시장 지배력이다.
이 때문에 업계에선 MSC가 확장의 조력자가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 공시를 통해 양측의 협력 관계가 처음으로 공식 확인된 것이다.
세계 컨테이너선 시장의 21%를 점유한 MSC는 그간 크루즈선, 벌크선, 자동차 운반선 등으로 영역을 빠르게 넓혀왔다. 유조선 시장 진입은 이번이 처음이다. 업계에선 신규 발주를 통해 선대를 확보하려면 수년이 걸리는 만큼, 장금상선과 결합하면 MSC가 단숨에 유조선 시장 지배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번 거래가 성사되면, 장금상선그룹은 단순한 투자 유치를 넘어 수조 원에 달하는 대규모 현금을 확보하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2024년 말 기준 장금마리타임의 자산은 3조3794억원으로, 최근 대규모 VLCC 매입을 반영하면 자산 규모는 최소 6조원을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룹 승계의 핵심 축으로 꼽히는 장금마리타임은 정 회장의 아들인 정가현 이사가 지분을 100% 보유하고 있다.
◇“게임 체인저” 전망… 독과점 규제가 관건
해운 업계에서는 이번 거래가 성사될 경우, 시장 판도가 바뀔 것으로 본다. 기존 VLCC 시장은 노르웨이, 중동, 그리스 등지의 중대형 규모 기업이 분점하는 구조였다. 하지만 MSC와 장금상선이 25% 안팎의 점유율을 바탕으로 시장을 통제할 경우, 운임과 선복 공급 구조 자체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VLCC 20여 척을 보유한 글로벌 선사 DHT홀딩스는 “특정 대형 그룹이 시장 구조 자체를 재편할 수 있는 규모로 성장하고 있다”며 경계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시장 지배력 확대에 따른 독과점 논란은 넘어야 할 문턱이다. 현재 그리스와 키프로스 규제 당국이 심사에 착수했고, 한국을 포함한 주요국의 승인 절차 역시 통과해야 한다.
☞VLCC(Very Large Crude Oil Carrier)
200만 배럴 규모 원유를 운반하는 30만t급 초대형 유조선. 중동에서 한·중·일 동아시아로 향하는 원유 대부분이 VLCC로 수송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