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무즈 해협 봉쇄 이전 해협을 통과한 마지막 원유 수송선이 20일 국내에 입항한다. 그 뒤로는 중동산 원유 유입이 사실상 끊긴다. 현재 정부·민간 합산 비축유는 약 1억9000만 배럴로, 국내 하루 소비량 280만 배럴 기준 68일치다. 강훈식 대통령 비서실장이 아랍에미리트(UAE)에서 긴급 확보한 2400만 배럴은 8일치다. 그나마 해당 물량이 출발할 UAE 푸자이라 항구는 이란의 미사일·드론 공격 범위 안에 있어 불확실성이 크다.
더 심각한 문제는 전쟁이 끝난다 해도 원유 공급 정상화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호르무즈 해협이 막혀 수출길이 없어진 중동 산유국들은 하루 단위로 생산을 줄이고 있다. 멈춰 선 생산 시설을 재가동하고 선적을 정상화하는 데는 수개월이 걸린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생산 시설이 전쟁 전 수준으로 돌아오려면 수주에서 수개월이 걸릴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 블룸버그는 “전쟁이 끝나도 각국이 비축유를 다시 채우려는 재고 확보 경쟁에 나서면서 유가는 2차 폭등을 맞이할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전쟁이 끝나도 원유 공급이 바로 정상화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전문가들은 “이제는 강력한 수요 관리를 국가 최우선 과제로 설정해야 한다”며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대응은 소비를 줄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가격을 억눌러 소비를 유지하기보다, 국민적 고통 분담과 국가적 절약 캠페인을 통해 기름을 덜 쓰는 것이 최선의 위기 대응책이라는 것이다.
◇140달러 접근한 두바이유
한국석유공사에 따르면, 국내 휘발유 평균 판매가는 석유 최고가격제 시행 직전인 지난 12일 L당 1898.78원에서 19일 오후 4시 기준 1822.07원으로 4.0% 하락했다. 경유 평균 가격은 L당 1918.97원에서 1819.60원으로 5.2% 내렸다.
국내 기름값만 보면 중동 상황이 진정된 것 같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아시아 국가들이 주로 수입하는 두바이유는 이날 배럴당 136.42달러까지 치솟았다. 최근 10년 새 최고치다. 국내 기름값의 기준이 되는 싱가포르 국제 휘발유 가격은 전쟁 전 배럴당 79.64달러에서 18일 139.78달러로 2배 가까이 폭등했다. 또 카타르 국영 카타르에너지의 사드 알카비 최고경영자(CEO)는 이날 로이터 통신과 인터뷰에서 “한국과 중국 등으로 향하는 LNG 장기 공급 계약에 대해 최장 5년간의 ‘불가항력(계약 이행이 불가능한 상황)’을 선언해야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한국은 카타르산 LNG의 최대 수입국 중 하나다.
하지만 이날 서울을 비롯한 주요 도시는 출퇴근 시간대 긴 차량 행렬로 극심한 정체를 빚었다. 위기가 가격에 반영되지 않으니, 국민도 행동을 바꾸지 않는 것이다. 손양훈 인천대 명예교수는 “지금 같은 에너지 위기에서 한국이 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 시급한 조치는 국민들이 에너지 소비를 줄이도록 만드는 것”이라며 “절약이 곧 안보”라고 말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도 수요 억제를 에너지 안보의 핵심 수단으로 보고, 회원국에 공급 차질 발생 시 석유 소비를 최대 10%까지 줄일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갖추도록 요구해왔다. IEA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인 2022년 3월 ‘석유 소비 감축을 위한 10대 수칙’을 통해 속도 제한 강화, 차 없는 일요일 실시, 대중교통 할인 등 구체적 수요 절감 조치를 권고한 바 있다.
전문가들이 수요 관리의 1순위로 꼽는 분야는 도로 교통이다. 수송 분야는 개인의 실천과 정부의 정책적 의지에 따라 에너지 소비량을 즉각적으로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그러나 고통 분담을 요구하기보다는 석유 최고가격제를 통해 인위적으로 기름값을 억누르는 쪽을 택했다.
석유 최고가격제는 대중교통 이용자의 세금으로 승용차 유류비를 보조하는 구조라는 점에서 역진적 배분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한 에너지 전문가는 “위기 시엔 고통 분담이 핵심인데, 정부 정책은 오히려 과다 소비층을 지원하고 정유사와 주유소에만 부담을 전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17일 국무회의에서 “자동차 5부제·10부제 등 수요 절감 대책을 수립하라”고 주문했고, 정부는 원유 자원안보 위기경보를 이틀 뒤 ‘주의’ 단계로 격상했다. 그러나 차량 부제는 공공·민간 적용 범위와 강제·권고 여부조차 아직 결론이 나지 않은 내부 검토 단계에 머물러 있다.
◇대중교통 이용만 늘려도 수요 확 줄어
정부가 선택한 가격 통제는 단기 민심 관리에는 효과적이지만, 에너지 안보를 위한 수요 관리와는 반대 방향이다. 국민이 위기를 느끼지 못하면 행동을 바꾸지 않고, 행동이 바뀌지 않으면 위기 장기화 국면에서 더 큰 충격에 직면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신현돈 인하대 교수는 “에너지 위기 상황이 더 악화될 경우 현재 검토 중인 차량 5부제를 비롯해 정부가 할 수 있는 모든 소비 절감 대책을 쏟아내야 한다”고 했다. 유승훈 서울과기대 교수는 “인위적인 가격 통제 방식은 국민에게 ‘에너지를 막 써도 된다’는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다”며 “이럴 때일수록 많은 국민이 소비 절감에 동참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