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 최고 가격제’가 시행된 첫날인 13일, 전국 주유소 기름값이 가파르게 하락했다. 전국 주유소 평균 휘발유 가격은 L(리터)당 1859.93원으로 전날보다 38.85원 내렸다. 지난달 28일 미국의 이란 공습 이후 휘발유 평균 가격이 전국에서 10원 이상 두 자릿수로 하락한 것은 처음이다. 서울 평균 휘발유 가격도 1885.85원으로 41.21원 하락했다. 경유 가격도 비슷한 낙폭을 보였다. 정부가 29년 만에 처음으로 시장 가격에 직접 개입하는 최고 가격제라는 강수를 둔 여파가 나타난 것이다.
이날 이재명 대통령이 “석유 최고 가격제를 어기는 주유소를 발견하면 즉시 제게 신고하라”고 소셜미디어에 글을 올리는 등 정부는 가격 인하 압박을 계속 이어갔다. 범부처합동점검단도 기름값 단속을 이어갈 방침이라, 당분간 주유소 기름값이 하향 안정세를 보일 것이란 전망이 많다. 하지만 이란 사태가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며 국제 유가가 치솟고 있어 불안 요소는 여전하다. 특히 석유 도매가를 묶는 방식의 최고 가격제로 수입 원가 부담이 갈수록 쌓여 정유사나 주유소 손실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가 계속 나온다.
◇최고 가격제 시행 첫날 주유소 기름값 두 자릿수 하락
정부는 이날 0시부터 정유사가 주유소에 공급하는 석유 도매 가격 상한을 제한하는 ‘석유 최고 가격제’를 시행했다. 앞으로 2주 간 도매 가격 상한은 L당 휘발유는 1724원, 경유 1713원, 등유 1320원이다. 시행 직전인 12일 기준 정유 4사의 평균 세후 공급가(휘발유 1830원·경유 1930원·등유 1730원)와 비교하면 휘발유 약 100원, 경유 약 200원, 등유는 약 400원 낮아지는 수준이다.
산업통상부의 ‘전국 주유소 가격 동향’에 따르면 이날 오후 2시 기준 전국 총 1만646개 주유소 가운데 휘발유 가격을 전날 종가보다 내린 주유소는 43.5%(4633곳)로 집계됐다. 전날 가격을 유지한 곳은 54.5%, 가격을 올린 곳은 2.0%에 그쳤다. 경유 가격도 비슷한 흐름을 보였다. 당초 에너지 업계에서는 도매 가격을 묶은 것이 일선 주유소의 소매 가격에 반영되려면 2~3일 걸릴 수 있다는 전망이 있었다. 최고 가격제 도입 전에 정유사에서 사 둔 재고가 남아 있는 곳이 적지 않다는 점 때문이었다. 예상이 빗나간 것은 이날 석유공사, 도로공사, NH농협 등이 운영하는 알뜰주유소가 정부 압박에 선제적으로 가격을 내리자 자영업자가 운영하는 일반 주유소들도 뒤따라 가격을 낮춘 영향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기존 재고를 털어내야 상한제가 적용돼 비교적 저렴한 새 물량을 받을 수 있다 보니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가격을 낮춘 주유소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수원의 한 주유소 사장은 “이틀 전 정유사에서 공급받은 가격 대비 경유는 약 80원, 휘발유는 약 10원가량 손해를 보게 되지만 우리만 비싸게 팔 수 없어 급하게 가격을 내렸다”고 했다. 주유소 업계는 앞으로 원가 부담이 커질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이날 열린 ‘석유 시장 점검 회의’에서 산업통상부에 현재 주유소 판매 가격의 1.5%로 책정된 카드 수수료를 절반 수준으로 낮춰달라고 요구했다.
다만 주유소를 찾는 발길은 늘었다. 서울 양천구에 사는 직장인 정찬영(30)씨는 이날 오전 8시쯤 집 근처 주유소에서 L당 1810원에 주유했다. 정씨는 “이달 초 L당 1950원대에 넣었던 기름이 3분의 1 정도 남아 있었지만 가격이 떨어질 때 빨리 넣는 게 속 편할 것 같아 주유했다”고 했다. 반면 기름값 추가 하락을 기대하는 이도 있었다. 서울 광화문 직장인 김모(32)씨는 “기름값이 계속 떨어질 것 같아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만 넣고 며칠 뒤 가득 채울까 한다”고 말했다.
◇이란 강경 대응 선언에 국제 유가는 올라
국제 유가가 계속 오르는 상황에서 최고가격제가 과연 근본적 해결책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도 계속 제기되고 있다. 이날 국제 유가는 이란의 초강경 대응 입장이 나오며 다시 급등했다. 이날 ICE선물거래소에서 5월 인도분 브렌트유 선물 종가는 배럴당 100.46달러로 전날보다 9.2% 올랐다. 종가 기준으로 100달러를 넘어선 건 2022년 8월 이후 3년 7개월 만이다.
정부는 가격상한제로 발생하는 정유사 손실을 보전해준다고 했지만, 100% 보전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란 관측이 많다. 결국 유가가 오르면서 정유사 손실이 쌓일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또 고유가가 장기화할 경우 정유사 손실을 보전해주느라 재정 투입 부담도 커질 수 있다.
유승훈 서울과기대 교수는 “최고가격제를 통한 당장의 가격 통제가 ‘위기가 심각하지 않으니 안심해서 평소처럼 (기름을) 써도 된다’는 잘못된 메시지를 주는 것은 아닐지 우려스럽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