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한구 산업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은 12일 긴급 브리핑에서 “미국의 이번 조사는 법원 판결 이전의 관세 구조를 복원하기 위한 것”이라며 “무역법 301조 조사에도 한국이 주요 경쟁국 대비 불리하지 않은 대우를 유지할 수 있도록 미국과 협의하겠다”고 밝혔다.

트럼프 미 행정부가 지난해 4월 ‘해방의 날’을 선언하며 각국에 부과했던 상호 관세의 근거는 국제경제비상권한법(IEEPA)이다. 미 연방대법원이 이를 위법으로 판결해 무효가 되자, 미 정부는 관세를 되살릴 새 법적 근거가 필요해졌다. 그 대안으로 꺼낸 카드가 무역법 301조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1일(현지 시각) 미국 켄터키주 헤브론에서 열린 지지자 집회에서 주먹을 쥐어 보이고 있다. 트럼프 정부가 이날 한·중·일 등을 상대로 착수한 무역법 301조 조사는 이란 전쟁 중에도 핵심 경제 정책인 관세의 복원만큼은 미루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풀이된다. /AFP 연합뉴스

‘수퍼 301조’로 불릴 만큼 강력한 이 법은 외국 정부의 불공정 무역 관행을 문제 삼아 관세를 부과할 수 있는 폭넓은 권한을 행정부에 부여한다. 관세율이나 부과 대상, 기한에 별다른 제한이 없다는 점에서 IEEPA의 빈자리를 채울 수단으로 일찌감치 거론돼 왔다.

작년부터 이달 4일까지 미국이 IEEPA 관세로 거둔 세입만 약 1660억달러(약 249조원)에 달한다. 각종 감세 공약의 재원으로 관세 수입을 내세웠던 트럼프 행정부로선 이 수입원을 포기할 수 없는 처지다. 이에 따라 미국 정부는 무역법 122조에 근거한 글로벌 관세 10%를 150일 동안 징검다리처럼 쓰면서, 그사이 301조 조사를 진행해 대체 관세를 매기겠다는 것이다. 우리 정부는 “7월 중순쯤 기존 수준(15%)의 관세가 다시 적용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美, 초스피드 조사 후 7월 내 관세 발표할 듯

USTR의 조사 명분은 ‘과잉 생산’이다. 이번 조사 대상 16국에도 미국의 주요 무역 적자국이 다수 올랐다. USTR은 연방 관보를 통해 국가별로 301조 조사 개시 이유를 밝혔다. 한국에 대해서는 “대규모 혹은 지속적 무역 흑자로 구조적 과잉 생산의 증거가 확인된다”고 주장했다. 한국이 전자 장치, 자동차·부품, 기계, 철강, 선박 등의 분야에서 글로벌 무역 흑자를 장기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국의 대미 무역 흑자가 최근 크게 늘어난 점, 한국 정부가 석유화학 분야에서 생산 설비 축소 필요성을 공식 인정한 점 등도 한국의 구조적 과잉 생산 정황으로 제시했다.

그래픽=이진영

USTR의 조사 대상에 대해 여한구 본부장은 “연방 대법원 판결 이전에 15% 상호 관세가 부과되던 품목에 적용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USTR이 철강·석유화학 등의 품목을 ‘과잉생산’의 한 축으로 거론한 데다 301조의 적용 범위가 넓은 만큼, 업계는 추가 관세 가능성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현재는 자동차에 15%, 철강 50%의 품목관세가 적용되고 있다.

한국의 대미 무역 흑자는 2021년 227억달러 수준에서 지난해 495억달러로 최근 크게 늘어났다. 우리 정부는 “최근 우리 기업의 대미 진출 및 투자가 늘면서, 현지 생산시설에 필요한 중간재 수출이 불가피하게 늘어났다”는 입장이다. 현지 생산시설에 필요한 장비 및 재료를 수출하며 대미 흑자 규모도 커진 만큼, 한국의 대미 무역 흑자가 미국 경기 활성화에 기여한다는 취지다. 여한구 본부장은 “제이미슨 그리어 USTR 대표에게 이 같은 점을 설명했다”며 “지난 무역 합의에서 보장된 최혜국 대우에서 벗어나는 결과가 나오면 안 된다는 것을 강조했다”고 했다.

◇“추가 관세·압박 우려…다시 협상 국면”

통상 301조 조사는 부당 무역 관행 조사 및 청문회 등에 1년가량 걸린다. 이번엔 다르다. USTR은 오는 17일부터 다음 달 15일까지 서면 의견을 접수하고, 5월 5일 공청회를 연 뒤 각국의 반박 의견을 7일 안에 받기로 했다.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글로벌 관세가 만료되는 7월 24일 이전에 조사를 매듭짓고 관세를 발표하기 위한 포석”이라며 “답을 정해두고 일방적으로 조사가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통상 전문가들은 “301조 조사 개시로 사실상 새로운 무역 협상이 시작된 것”이라며 “이 과정에서 추가적인 무역 압박과 관세 위협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방한 중인 마이클 디솜브레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가 12일 정의혜 외교부 차관보와 면담에서 ‘쿠팡에 대한 한국 정부의 차별적 대우가 없어야 한다’는 취지로 말한 것도 이런 우려를 뒷받침한다. 디솜브레 차관보는 ‘비관세 장벽 문제도 관심을 기울여 달라’고 했다고 한다.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은 “USTR이 이번 조사를 계기로 자국 산업에 도움이 된다고 보는 자동차나 반도체 등에 대해 현지 생산 및 투자 확대를 강하게 압박할 가능성도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