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나란히 천문학적 자사주 소각을 선언했다. 지난달 9일 SK하이닉스가 13조5700억원 규모 소각을 단행했고, 이달 10일 삼성전자도 15조7000억원어치를 6월 말까지 소각하겠다고 밝혔다. 합산액은 무려 29조원. 반도체 라인 하나를 새로 깔만한 돈이다.

숫자만 보면 화들짝 놀랄 만하다. 자사주 의무 소각을 명시한 ‘3차 개정 상법’ 여파로, 많은 기업이 소각 계획을 내놓고 있지만 이처럼 10조원대 소각은 이례적이다. 지난해 각각 40조원대였던 양사 영업이익의 4분의 1이 넘는 가치의 자사주를 단번에 소각하기로 한 것이다.

이 같은 시나리오가 가능했던 것은, 두 회사가 반도체 불황기에 저가로 사들였던 자사주가 최근 주가 폭등으로 가치가 크게 올랐기 때문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주주를 달래기 위해서 사들였던 ‘미운 오리’ 자사주가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한 셈”이라고 했다.

◇“쌀 때 사서, 비쌀 때 태워”

삼성이 자사주 대규모 매입을 선언한 건 2024년 11월이다. 당시 주가는 4만9900원, ‘4만 전자’에 신음하던 주주들의 원성이 한창이던 때였다. 삼성은 1년간 10조원어치를 분할 매입하겠다고 밝혔다. 이후 삼성이 세 차례에 걸쳐 사들인 자사주의 평균 단가는 5만4000원~7만원이다. 이 중 3조원어치는 바로 소각했다. 나머지 7조원 가운데 5조3000억여 원은 소각용, 그 외는 임직원 보상용으로 떼어놓고 삼성은 소각 시기를 저울질해 왔다.

상황이 급변한 것은 작년 말부터다. 반도체 사이클에 대한 기대로 주가가 폭등하면서 보유 자사주 가치 역시 치솟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삼성전자가 10일 밝힌 8696만여 주의 자사주 소각은 당일 종가(18만7900원) 기준 15조7000억원 수준으로 크게 불었다. 당초 삼성이 발표한 10조 자사주 매입·소각을 훨씬 뛰어넘는 규모가 돼 버린 것이다.

소각 물량은 동일하기 때문에 가치가 16조원으로 커졌다고 주주가 더 이익을 보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삼성 입장에선 주가가 쌀 때 자사주를 대규모로 사면서 주주를 달래고, 비쌀 때 이를 태우면서 소각액도 훨씬 커 보이는 ‘일석이조’ 효과를 거둔 셈이다.

◇SK하이닉스는 10배 이상 폭등

SK하이닉스의 자사주 ‘재테크’는 더 극적이다. SK하이닉스가 처음 자사주를 대량으로 사들인 것은 ‘메모리 겨울’ 우려가 크던 2015년 7월이었다. ‘주가 안정을 통한 주주 가치 제고’를 이유로 2200만주 매입 계획을 내놨고, 이후 3개월간 7700억원을 투입해서 자사주를 사들였다. 평균 단가는 3만5023원이었다. SK하이닉스는 2018년에도 평균 단가 7만8806원에 2200만주를 또 사들였다.

이를 장기 보유하던 SK하이닉스는 2023년 반도체 불황이 닥쳤을 때 2012만여 주를 담보로 교환사채(EB)를 발행했다. 이를 통해 2조2400억원을 조달해 위기를 넘겼다. 그리고 임직원 보상용 외에 남아 있던 1530만주를 이번에 전량 소각하기로 한 것이다. 지난 1월 말 소각 발표 당시 주가는 80만원이었지만, 실제 소각일이었던 지난달 9일 종가는 88만7000원으로 10% 넘게 올라 결과적으로 13조5700억원 상당의 대규모 자사주를 처분하게 됐다. ‘자사주 소각’ 숙제가 청와대와 정부로부터 내려온 상황에서, 회사 입장에선 자사주 장기 보유를 통해 10배 넘게 가치를 키워서 태우는 효과를 톡톡히 누린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