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 서울 서린사옥./SK

국내 2위 SK그룹의 지주사인 SK㈜가 5조1600억원 상당의 자사주를 소각하기로 했다. 전체 발행 주식의 20%를 한꺼번에 소각하는 것으로, 전례 없는 규모다. 그룹 지주사 가운데 역대 최대다.

기업이 취득한 자사주의 의무 소각을 원칙으로 하는 3차 개정 상법이 지난 6일 전면 시행된 지 나흘 만이다. SK그룹은 재계에서도 경영권을 가진 최대 주주인 최태원 회장 측의 지주사 지분율이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었다. 자사주 소각 의무화로 외부 공격에 노출될 우려가 그만큼 큰 곳으로 꼽혀왔다. 그런데도 5조원 넘는 규모의 자사주를 한꺼번에 소각하는 과감한 결정을 내려, 앞으로 자사주 비율이 큰 다른 기업들이나 금융사 등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한 재계 관계자는 “주주에겐 축제지만, 경영권 위협을 감안하면 기업에겐 숙제도 함께 주어진 상황”이라고 했다.

◇경영권 위협, 세금 감수하고 소각 결정

SK㈜는 10일 이사회를 열고 이 같은 내용의 자사주 소각 계획을 의결했다. 현재 보유 중인 자사주 24.6% 가운데 임직원 보상용 4.5%를 제외한 20.1%를 내년 1월 전량 소각하는 내용이다. 소각 대상은 1469만여 주로, 이날 종가 기준으로 5조1600억원에 달한다. 지난 6일 ‘3차 개정 상법’이 시행된 것이 배경이다. 기업이 새로 취득하는 자사주는 취득일로부터 1년 내 소각하고, 기존 보유 자사주는 시행일로부터 1년 6개월(2027년 9월) 이내에 소각하는 게 골자다.

SK는 대규모 자사주 소각에 대해 “전체 주주의 최대 이익에 부합하고 기업 가치를 높이는 최적의 방안이라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과제도 생겼다. 현재 SK㈜의 지분은 최태원 회장 및 특수관계인 25.4%와 자사주 24.6%, 기타 주주 50%의 사실상 ’반반(半半) 구도’다. 하지만 이번 자사주 소각으로 전체 주식 수가 줄면서, 최태원 회장 및 특수관계인의 지분은 31.8%로, 기타 주주의 지분율은 62.6%로 높아졌다. 최 회장 측 입지가 좁아진 셈이다.

자사주는 국내 기업들의 ‘잠재적 방어막’ 역할을 해왔다. 자사주는 원래 의결권이 없지만, 경영권 분쟁 시 우호적인 제3자(백기사)에게 매각해 우호적인 의결권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내엔 차등의결권, 포이즌필(신주인수선택권) 같은 ‘경영권 방어’ 장치가 없어, 많은 기업이 자사주를 방어 수단으로 활용해왔다. 특히 과거 ‘소버린 사태’를 겪었던 SK 입장에선 적대적 세력의 공격에 더 민감할 수밖에 없는데, 이번 소각 결정으로 경영권 방어벽이 더 낮아지게 됐다.

대규모 세금도 부담이다. SK㈜가 보유한 자사주(24.6%) 가운데 15%는 2015년 SK C&C 흡수 합병 당시 현물 출자를 받으며 생긴 것이다. SK㈜는 이를 사업에 활용할 것이라는 점을 내세워, 주식 처분 시까지 과세를 미뤄주는 특례를 적용받았다. 하지만 이번에 소각을 결정하면서 4000억원에 달하는 법인세(양도소득세)를 내게 됐다.

◇조 단위 소각 잇따라

SK 사례를 계기로 기업, 금융사 등의 자사주 소각 움직임은 더 활발해질 전망이다. 이미 자사주 소각 계획을 밝힌 곳도 적지 않다. 9일 롯데지주는 현재 보유한 27.5%의 자사주 가운데 5%(약 1663억원)를 오는 31일 우선 소각하겠다고 밝혔다. 두산은 지난달 말 총 3조1200억원에 달하는 자사주를 연내 소각한다는 계획을 내놨다. ㈜LG는 상법 개정 논의 전인 2024년 말 선제적으로 5000억원 규모의 자사주 소각 계획을 밝혔다. 지난해 절반을 소각했고, 나머지는 올 상반기 내에 소각할 예정이다. 삼성전자도 올 상반기 중 8700만주, 15조7000억원 규모의 자사주를 소각할 계획이라고 10일 밝혔다. 한국경제인협회는 “경제계가 한국 증시의 선진화를 위해 주주 환원 노력을 강화하고 있는 만큼, 국회도 기업들의 경영 활력 제고 입법에 노력해주길 바란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