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봉투법’으로 불리는 개정 노동조합법 2·3조 시행 첫날부터 원청 기업을 상대로 한 하청 노조의 교섭 요구가 잇따르고 있다. 특히 자동차와 조선, 건설 등 협력사 의존도가 큰 업종에서 원청과 하청 간 임금·성과급 격차를 해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 올해 임금·단체협상이 그 어느 때보다 난항을 겪을 것으로 전망된다.

10일 자동차 업계에 따르면 현대모비스의 하청 기업으로 전국금속노조에 소속돼 있는 현대아이에이치엘 노조는 이날 오전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 현대모비스 본사 앞에서 현대모비스의 램프사업부 매각을 반대하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현대아이에이치엘 노조는 지난 1월 현대모비스가 램프사업부를 매각하기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한 직후부터 줄곧 이 결정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혀 왔다.

램프를 납품하던 자회사인 현대아이에이치엘 직원들의 고용 불안이 우려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들은 현대모비스에 램프사업부 매각 반대 의사를 전달하고, 임금 인상을 위한 2026 단체교섭에도 응하라고 요구했다.

현대아이에이치엘 등이 10일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 현대모비스 본사 앞에서 '원청 교섭 요구' 기자회견을 열었다./금속노조 제공

금속노조 산하에 있는 포스코 사내 하청 광양·포항지회도 이날 테헤란로 포스코센터 앞으로 집결했다. 포스코가 인건비 절감과 자유로운 해고를 위해 2만명에 달하는 하청 노동자를 사용해 왔는데, 이는 ‘불법 파견·불법 고용’ 범죄라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노조는 “포스코는 실질적 사용자임을 인정하고, 하청 노동자와의 단체교섭에 즉각 응하라”고 촉구했다.

노란봉투법 시행과 함께 원청을 상대로 한 교섭 요구에 나선 기업은 이 뿐만이 아니다. 현대차와 HD현대중공업 하청노조는 이날 3번째 교섭 요구서를 보내는 등 원청을 교섭 테이블에 앉히기 위한 절차를 밟기로 했다. HD현대중공업 하청노조는 임금 인상·성과급 지급 등을, 현대차 하청노조는 정규직 전환 등을 요구하고 있다.

'노란봉투법' 시행 첫날인 10일 서울 세종대로에서 민주노총 투쟁 선포대회가 열렸다./연합뉴스

노동계에 따르면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노총)은 소속 7개 산별노조의 원청 사업자에게 교섭 요구 공문을 일제히 발송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900여 사업장에서 일하는 13만7000여명의 하청 노동자가 원청과의 교섭 요구에 참여한다. 이날 민노총은 서울 세종대로에서 “진짜 사장 나와라”를 외치며 원청 교섭 쟁취 투쟁을 본격 선포하기도 했다.

금속노조는 이날 “현재까지 기업 147곳에 종사하는 조합원 1만명이 16개 원청에 교섭을 요청한 것으로 집계됐다”며 “원청 교섭 요구 조합원 수를 앞으로도 계속 늘려갈 것이고, 원청이 교섭에 응하지 않을 경우 투쟁으로 답할 것”이라고 했다.

◇ ‘실질적 결정’ 원청과 직접 교섭 길 열려

노란봉투법은 사용자 범위와 노동쟁의 대상을 확대하고, 파업 노동자에 대한 기업의 손해배상 청구를 제한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하청이 ‘실질적·구체적 지배·결정권’을 가진 원청과 직접 교섭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쟁의 대상도 임금 등에 더해 실질적 근로 조건 변동을 초래한다는 이유를 들 경우 해외 투자나 공장 증설 등까지 가능해졌다.

그래픽=정서희

재계는 노란봉투법 시행으로 하청 업체 노조의 교섭 요구가 빈발해 회사 운영에 극심한 혼란이 빚어질 것이라며 우려하고 있다. 고용노동부가 해석 지침을 마련하긴 했지만, 일부 노동계가 단순히 원청이라는 이유만으로 교섭을 요구하고 있어 법적 분쟁과 원청·하청 기업들의 갈등을 피할 길이 없을 것이라는 게 경영계의 주장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는 “법 시행 전부터 하청 노조가 원청이 교섭에 나올 것을 요구하며 사업장 점거 농성을 하는 등 불법적 실력 행사를 통해 회사를 압박하는 사태가 벌어졌다”며 “사용자 범위와 교섭 의제를 두고 노사 간 분쟁이 지속될 것으로 우려된다”고 했다.

최소한의 노사 관계 안정을 위해서는 서로 원칙을 준수해야 한다는 것이 재계의 입장이다. 경총은 “노동계는 원청 기업과의 단체 교섭에 사용자성이 인정된 범위 외의 무리한 요구를 내세우거나 이를 관철하기 위한 불법 행위를 자제해야 하며, 교섭 절차를 준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정부와 노동위원회도 교섭 절차 매뉴얼에서 벗어나는 노동계의 요구나 쟁의 행위가 발생하지 않도록 행정력을 집중하고, 엄정한 판단 체계를 확립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10일 서울 세종대로에서 열린 민주노총 투쟁 선포대회에서 '원청 교섭 쟁취! 진짜 사장 나와라!' 현수막이 트럭에 걸려 있다./이윤정 기자

◇ 올해 임단협 혼란 예고… 기업들 “교섭 1호 기업 피해야”

재계에서는 올해부터 임금·단체협상을 둘러싸고 극심한 혼란을 빚을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한다. 하청 노조는 임금·성과급을 인상해 원청과 격차를 줄여줘야 한다고 기업에 요구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원·하청 구조가 뚜렷하고 적게는 수백개에서 많게는 수천개 협력사를 지닌 조선·자동차·건설업계는 천문학적 규모의 비용을 추가로 요구받는 셈이다.

현대차의 경우 협력 회사가 약 8500곳에 달한다.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 삼성중공업 등은 전체 직원 중 사내 하청 비중이 60% 수준이다. 실제 한화오션에서는 하청 급식 업체인 웰리브 직원들이 성과급 지급을 요구하며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웰리브 노조는 “원청인 한화오션과의 교섭 성사가 개정 노동조합법을 노동 현장에 제대로 자리 잡게 만드는 시작이 돼야 한다”며 압박 중이다. 민노총 역시 이날 세종대로에서 행진을 시작해 한화오션에 원청 교섭을 촉구하는 항의서한을 전달하는 것으로 행사를 마무리 짓기로 했다.

각 기업들은 일단 ‘원청 교섭 1호 사업장’이 되는 것만큼은 피하겠다며 적극적인 대응을 자제하는 분위기다. 익명을 요구한 원청 대기업 관계자는 “수십 개에 달하는 하청 노조와 직접 협상에 나서게 되면 기업 입장에선 관리 비용과 행정적 부담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커지게 된다”며 “기존 정규직 노조의 반발에 정치권의 주목까지 받게 될 수 있어 일단 상황을 지켜볼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