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국내 최대 에틸렌 생산 시설인 여수의 여천NCC(나프타 분해 시설)가 미·이란 전쟁 발발 나흘 만에 ‘공급 불가항력(Force Majeure)’을 선언한 것을 계기로 미·이란 전쟁 여파가 산업계 전반에 빠르게 확산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불가항력’이란 통제할 수 없는 외부 요인으로 계약을 이행하기 어려울 때 책임을 면제받기 위해 선제적으로 선언하는 것이다. NCC는 나프타(납사)를 고온·고압으로 분해해 에틸렌, 프로필렌 등 기초 제품을 생산하는 석유화학 산업의 출발점이다. 하지만 여천NCC는 나프타 수급이 어려워지며 생산 차질이 생길 가능성이 커지자 불가항력을 선언한 것이다.

그래픽=양인성

석유화학 업계에선 이번 사태가 여천NCC를 넘어 산업 전반으로 파장이 번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재고를 감안하면 전쟁이 3월 중하순까지 길어질 경우, ‘불가항력 연쇄 선언’이 나올 수 있다는 관측도 있다. 중국발 공급 과잉으로 구조조정 중인 석유화학 업계는 원자재 수급 및 비용 증가라는 예기치 못한 복병까지 만나며 악재가 겹치게 됐다.

◇여천NCC, 전쟁 나흘 만에 “생산 곤란”

여천NCC는 전남 여수에 한화솔루션과 DL케미칼이 공동으로 만든 회사로, 에틸렌 생산 능력이 연 228만t에 달해 국내 단일 에틸렌 생산 시설 중 최대 규모다. 하지만 지난 4일 업계에서 가장 먼저 불가항력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최근 2~3년간 중국발 공급 과잉으로 에틸렌 가격이 급락하자, 여천NCC는 지난해 47만t 규모 3공장 가동을 일시 중단하는 등 구조조정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원자재 재고를 많이 줄여둔 탓에 이란 사태가 갑자기 터지며 대응을 못 하게 된 것이다.

산업통상부와 업계에 따르면, 현재 국내 석유화학 기업이 보유한 나프타 재고는 약 2주일 분량에 그친다. 이보다 전쟁이 길어지면 ‘공급 불가항력’ 선언이 잇따를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이번 전쟁으로 국내 전체 나프타 공급의 4분의 1이 사실상 중단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국내 나프타 공급량 중 절반은 국내 정유사가 생산하고 나머지 절반은 수입하는데, 수입량 절반이 호르무즈 해협을 거친다. 나프타 수급이 어려워지면 기업은 재고로 버티며 공장 가동률을 최저 수준으로 낮추는 수밖에 없다. 공장이 아예 멈춰서면 재가동에 상당한 비용이 들어서다. 한국만의 일도 아니다. 이미 인도네시아·싱가포르 등의 석유화학 기업 중에도 나프타 공급이 막히며 ‘공급 불가항력’ 선언을 하는 곳이 나오고 있다.

◇석화 업계, 공급 과잉에 가격 전가 불가

국내 석화 기업들 입장에선 ‘엎친 데 덮친 격’이 됐다. 원재료인 나프타 수급이 어려워지자 가격이 치솟고 있어서다. MOPJ(일본 도착 가격 기준)에 따르면 올 1월 1t(톤)당 633달러 수준이었던 아시아 나프타 가격은 6일 약 776달러까지 올랐다. 그러나 중국발 공급 과잉이 여전한 상황이라 나프타 가격이 오른 만큼 범용 제품 가격을 올릴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올릴 경우 판매가 줄 우려가 크다. 김평중 한국화학산업협회 총괄본부장은 “결국 석화 기업들이 원가 부담을 떠안으며 마진률만 더 낮아질 것”이라고 했다.

기업들은 정부와 중동이 아닌 미국·인도 등에서 나프타를 확보하는 방안, 국내 정유사의 나프타 생산 확대를 요청하는 방안 등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해외 기업들도 대체 수급처를 찾아 나선 탓에 대응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현재 진행 중이던 석화 산업 재편에 미칠 영향도 관건이다. 정부는 NCC 설비 가동을 줄여 기초 제품 공급을 줄이면서도, 고부가가치, 친환경 제품으로의 전환을 유도하는 게 목표다. 하지만 이번 사태로 기업들 수익성이 크게 떨어지며 사업 전환 속도 역시 느려질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다만 일각에선 원자재 부족 사태가 길어지면 NCC 설비 통폐합 논의가 오히려 더 빨라질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구조조정 속도가 빨라질 것이란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