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6일 찾은 부산 강서구 부산신항. 길이 335m, 높이 약 50m에 달하는 초대형 컨테이너선 HMM ‘에메랄드호’ 조타실 위에는 가로·세로 약 30㎝ 안팎의 흰색 장비 하나가 설치돼 있었다. 적외선 카메라와 광학 카메라가 각각 3개씩 달린 이 장비는 전방 약 14㎞ 해역을 감시한다. 이 카메라와 각종 센서 데이터를 인공지능(AI)이 분석해 선박 주변 상황을 인식하고 항로와 속력을 계산한다.
이 기술은 HD현대의 자율 운항 전문 회사 아비커스가 개발한 AI 기반 선박 자율 운항 시스템 ‘하이나스 컨트롤(HiNAS Control)’이다. 지난 1월 아비커스는 HMM이 운용 중인 선박 40척에 자율 운항 설루션 ‘하이나스 컨트롤’을 공급하는 계약을 체결하며 자율 운항 사업 확대에 속도를 내고 있다. 에메랄드호는 이 기술을 실제 항로에서 시험하는 파일럿 테스트 선박이다.
이 기술 개발을 이끈 아비커스의 박진모 자율운항제어연구팀장은 선박 자율운항 기술을 자동차 자율주행과는 다른 방식의 기술이라고 설명했다. 박 팀장은 “자동차 자율주행이 도로 위에서 순간적인 판단을 하는 기술이라면, 선박 자율운항은 거대한 관성과 외력을 계산해 미리 위험을 피하는 기술”이라고 말했다. 수만 톤에 달하는 대형 선박은 자동차처럼 급정지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형 선박은 위험을 감지해 정지하는 데만 수십 분이 걸릴 수 있다. 이 때문에 자율운항 시스템은 현재 상황뿐 아니라 앞으로 한 시간 뒤 상황까지 예측해 충돌 가능성을 계산한다. 선박 주변 환경을 미리 분석해 속력과 항로를 조정하는 방식이다.
바다에는 예상하지 못한 변수도 많다. 대형 상선은 정해진 항로를 따라 움직이지만 소형 어선이나 낚싯배는 예측 범위를 벗어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일부 어선은 ‘큰 배를 따라가면 어복이 있다’는 속설 때문에 일부러 접근하기도 한다. 아비커스는 이런 상황까지 데이터로 수집해 알고리즘을 보완하고 있다.
박 팀장은 자율 운항 기술이 선박 운항 효율 개선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AI가 기상과 항로 조건을 분석해 최적 속력과 항로를 계산하기 때문에 불필요한 항로 변경이나 급격한 속도 조절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현재 기술 수준에서도 연료 사용과 탄소 배출을 약 5% 정도 줄일 수 있다”며 “대형 선박의 경우 연간 수십억 원 규모의 연료비 절감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해운업계가 자율 운항 기술에 주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국제해사기구(IMO)의 환경 규제가 강화되면서 선박의 연료 효율과 탄소 배출 관리가 중요해졌고, 글로벌 해운업계에서는 선원 고령화와 인력 부족 문제도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AI 기반 운항 기술은 항해사의 판단을 보조하고 장거리 항해 과정에서 발생하는 운항 피로도를 줄이는 대안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해운 산업의 경쟁력 자체도 달라질 것이라는 전망이다. 박 팀장은 “앞으로는 누가 더 빠르게 화물을 운송하느냐보다 누가 더 적은 탄소로 운항하느냐가 중요한 경쟁력이 될 것”이라며 “AI와 데이터를 기반으로 하는 정밀 운항 기술이 해운 산업의 새로운 기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