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영도조선소를 거점으로 둔 HJ중공업은 지난달 10일 유럽의 한 선사로부터 3532억원 규모의 1만100TEU(1TEU는 20피트 컨테이너 1개)급 친환경 컨테이너선 2척을 수주했다. 영도조선소가 설립 이래 약 90년간 1만 TEU급 이상의 대형 컨테이너선을 수주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조선소 입장에선 작은 선박 여러 척보다 대형 선박 한 척을 만드는 게 수익성이 높다. 하지만 영도조선소는 배를 만드는 공간인 독(dock·선박 건조장) 길이가 300m에 불과해, 배 길이가 보통 300~400m 안팎에 이르는 대형 선박을 만드는 게 어려워 수주할 엄두를 못 냈다.

HJ중공업은 기술로 이 한계를 극복했다. 일반 컨테이너선과 비교해 선체 폭을 가로로 더 늘리고 선박 내 적재 공간 효율을 극대화하는 최신 설계 기술을 선보인 것이다. 회사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 고민한 결과 전체 선적량(1만 100TEU)은 유지하되 좁은 독 안에서도 대형 컨테이너선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셈이다.

지난해 HJ중공업·대한조선·케이조선 등 중형 조선3사는 영업이익이 전년 대비 2배 이상으로 늘어나는 등 HD현대·한화오션·삼성중공업 등 조선 ‘빅3’ 못지 않은 성장세를 보였다. 가장 큰 비결 중 하나는 HJ중공업처럼 각종 제약 속에서도 ‘주특기’를 새로 개발한 점이다. 특히 중형 조선사들은 10년 가까운 조선업 침체를 경험하면서 생존을 위해 친환경 선박 제조 및 설계 기술 등을 새로 개발해왔다. 이 노력이 최근 조선업 호황을 맞아 비로소 빛을 보고 있다는 평가다.

◇불황 속 주특기 갈고 닦은 중형 조선소

최근 실적을 발표하고 있는 중형 조선소들의 성적표는 뚜렷한 개선세를 보이고 있다. 대한조선은 지난해 영업이익이 2941억원으로 전년 대비 86% 급증했다. HJ중공업 역시 지난해 670억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하며 이익 규모를 전년 대비 825%나 키웠다. 실적 공개를 앞둔 케이조선도 지난해 1~3분기 누계 영업이익(847억원)이 전년 전체 실적의 7배를 뛰어넘는다.

대한조선의 경우 수익성 높은 제품으로 주력 선박을 확대한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이 회사는 10년 전쯤엔 ‘아프라막스급’(적재물 중량 8만~12만t) 원유 운반선이 주력이었지만 최근 수년간 제작 난도가 높은 수에즈막스급(12만~20만t) 개발로 ‘전공’을 넓히기 위해 더 두껍고 무거운 선박 블록 생산·조립 역량을 키우는 등의 투자를 해왔다. 그 결과가 올해 나오고 있다. 지난 1~2월에만 수에즈막스급 원유 운반선 8척을 수주하며 1조200억원의 일감을 확보한 것이다.

또 2024년부터 고부가가치 선박인 ‘셔틀탱커’를 집중 수주한 것도 실적에 반영되고 있다. 셔틀탱커는 망망대해에 떠 있는 해상 원유 시추선에서 직접 기름을 받아 육지로 나르는 특수 목적선이다. 시추선에서 기름이 옮겨지는 동안 선박이 고정돼 있어야 하는 등 고가의 위치 제어 장비 등이 탑재돼 부가가치가 높은 제품 중 하나다.

케이조선 역시 2010년대 STX조선 시절 초대형 컨테이너선부터 해양플랜트까지 지나치게 다각화를 했다 부실에 빠진 과거를 반면교사 삼았다. 대신 과거 주력 제품이었던 석유화학 제품 운반선(MR탱커)을 중심으로 사업 재편을 했다. 최근 1~2년 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홍해 사태 등으로 석화 제품 운송 시간이 길어지며 MR탱커 수요가 늘어나자, 그 효과를 봤다. 지난해 15척, 올해도 1~2월에만 5척을 수주한 것이다.

◇친환경 다각화가 미래

중형 조선소는 대형 조선소의 전유물 같았던 친환경 선박 시장에도 진출할 채비를 하고 있다. 목표는 수익성이다. 일반 선박에 비해 다양한 친환경 설비가 들어가는 만큼, 같은 규모의 배라도 더 비싸게 판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케이조선은 작년 9월 글로벌 선박 안전 평가 기관인 노르웨이선급(DNV)으로부터 차세대 선박인 ‘LNG 벙커링선’ 기본 설계 인증(AIP)을 받았다. ‘바다 위 주유소’로 불리는 LNG 벙커링선은 LNG 추진 선박에 연료를 공급하는 특수 선박인데, 케이조선은 이 인증을 바탕으로 친환경 가스선 수주에 나설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