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6일 부산 강서구 부산신항 4부두. 길이 335m에 폭 51m 규모, HMM의 컨테이너선 ‘에메랄드호’가 정박 중이었다. 1만3000TEU(20피트 컨테이너 1만3000개)급인 이 배는 중국과 한국을 거쳐 미 로스앤젤레스(LA)와 오클랜드를 오가는 미주 서안 항로를 운항한다. 약 8주 동안 2만㎞를 항해하며 전자제품과 생활용품, 산업 부품 등 다양한 화물을 나른다.
에메랄드호는 2024년 11월부터 조타실 지붕 위에 가로 25㎝, 세로 35㎝ 크기 새 장치를 장착했다. 자율운항 전문기업 아비커스(HD현대 자회사)가 개발한 AI 기반 자율운항 시스템 ‘하이나스 컨트롤(HiNAS Control)’, 한마디로 ‘AI 눈’을 달았다. 적외선·광학 카메라를 장착한 이 장치가 24시간 내내 전방 14㎞ 해역을 훑어 수집한 영상과 데이터를 기반으로, 이 배는 스스로 주변 선박을 인지하고 충돌 위험을 계산해 최적 항로와 속력을 제안한다. 아비커스에 따르면, 대형 상선용 자율운항 시스템이 실제 컨테이너선에 적용된 것은 세계 최초다.
◇AI가 최적 항로와 속력 제안
박상현(47) 선장은 “전장에서 총을 하나 가진 사람과 2~3개 가진 사람은 전투력이 다르지 않으냐”며 “항해사가 더 많은 도구를 가지고 운항할 수 있게 되면서 안전도가 높아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는 선원이 탑승한 채 시스템이 항로와 속력을 계산하고 일부 제어를 수행하는 ‘조력자’ 단계다. 하지만 에메랄드호는 연료 사용과 탄소 배출을 연간 2.5~4.5% 줄이는 효과를 보고 있다. AI 시스템은 실시간으로 변하는 바람·파도 같은 물리적 힘과 소형 어선이나 낚싯배 같은 예측불허 변수까지 데이터를 수집해 알고리즘을 고도화하고 있다.
박진모 아비커스 자율운항연구지원팀장은 “자동차 자율주행이 순간 판단의 기술이라면 선박 자율운항은 미리 위험을 피하는 기술”이라고 설명했다. “지금 상황뿐 아니라 한 시간 뒤 상황까지 예측해 충돌 가능성을 계산한다”는 것이다. 수만t급 선박은 급정지가 불가능해 멈추는 데만 수십 분이 걸리기 때문이다.
부산에 위치한 HMM 선박종합상황실은 자율운항의 또 다른 축이다. 현재 HMM 최신형 선박 40여척과 실시간으로 연결돼 있다. 한 척당 수집되는 데이터 항목은 엔진 상태, 연료 사용량, 선속, 항로정보 등 9000여개. 이 정보들이 분 단위로 상황실로 전달된다. 매달 35테라바이트(TB), 스마트폰 사진(3MB 기준) 1160만장 분량의 정보가 축적된다.
◇35TB 데이터 모이는 선박종합상황실
해운사가 자율운항 도입에 나서는 이유는 우선 선원 부족 때문이다. 한국인 선원의 약 3분의 2가 50세 이상으로, 2026년에는 전 세계적으로 선원 2만여 명이 부족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둘째는 환경 규제다. 국제해사기구(IMO)는 내년부터 온실가스 초과 배출 선박에 탄소세를 부과한다. 자율운항은 불필요한 속도 변화와 항로 이탈을 줄여 연료 효율을 높인다. 셋째가 안전이다. 전 세계 해상 사고의 70~80%가 인적 오류에서 비롯된다. AI가 사고 예방 안전망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율운항 시장을 선점하려는 글로벌 경쟁은 치열하다. 영국 롤스로이스, 노르웨이 콩스베르그 등은 자율운항 기술을 주도하고 있고 일본은 2022년 무인 탑승으로 출항·운항·입항 실증을 마쳤다. 다만 유럽과 일본은 소형선 중심이다. 아비커스는 초대형 원양 컨테이너선으로 승부수를 띄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