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약업계 매출 5위, 영업이익 1위인 한미약품에서 대주주와 전문 경영진 간 분쟁이 벌어지고 있다. 창업주 고(故) 임성기 회장 별세 이후 가족 간 분쟁을 정리하며 ‘구원투수’로 등장했던 대주주가 사실상의 오너로 군림하면서, 기업 경쟁력이 훼손되고 있다는 내부 반발이 터져 나온 것이다. 오너 일가 간 경영권 분쟁이 잠잠해진 지 1년여 만이다.
24일 경기도 평택 공장에서 상경한 한미약품 직원들은 서울 송파구 본사 로비에서 피켓을 들고 침묵시위를 벌였다. 전날 본부장과 임원 20여 명이 단체행동에 나선 데 이은 이틀째 시위다. 피켓은 ‘한미약품은 대주주의 개인 소유물이 아니다’ ‘신동국 대주주는 한미약품 경영에서 당장 손 떼라’는 등의 내용이었다. 전문 경영인인 박재현 한미약품 대표도 “대주주로부터 부당한 경영 간섭을 받고 있다”며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었다.
오너의 지시가 불문율로 통하는 한국 기업 문화에서 전문 경영진이 ‘회사 경쟁력이 훼손된다’며 반기를 든 것은 이례적이다. 특히 대주주 전횡 방지 조항을 담은 개정 상법이 시행된 상황이라, 한미약품에 시장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분쟁 여파로 한미약품 그룹 지주사인 한미사이언스 주가는 이날 장중 상한가를 기록했다.
◇대주주의 경영 개입 논란
갈등의 중심에는 지주사 한미사이언스 지분 29.8%와 한미약품 지분 9.05%를 보유한 개인 최대 주주 신동국(76) 한양정밀 회장이 있다. 임성기 창업주의 고향 후배인 신 회장은 2024년 임 회장의 부인 송영숙 회장과 임주현 부회장 모녀와 손잡고 전문 경영인 체제를 약속하며 가족 경영권 분쟁을 매듭지었던 인물이다. 그러나 전문 경영진들은 신 회장이 약속과 달리 경영 전반에 과도하게 개입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갈등이 폭발한 계기는 지난해 말 발생한 사내 성추행 처리 문제였다. 가해자로 지목된 임원에 대해 박 대표가 중징계를 추진하자, 신 회장이 이를 막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박 대표가 공개한 녹취에 따르면 신 회장은 가해 임원에 대한 징계 방침에 “말이 되는 이야기냐”고 질책했다. 결국 해당 임원은 징계 없이 자진 퇴사했고, 사내 여론은 악화됐다.
박 대표 측은 인사 문제 외에도 경영 전반에 대한 개입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신 회장이 팔탄 공장의 수선유지비 절감을 강요해 잦은 설비 고장과 생산 지연이 초래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원가보다 품질’을 중시하던 기존 정책을 깨고, 원료 공급처를 통합하거나 국산 대신 저렴한 중국산 원료를 사용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신 회장은 현재 한미사이언스와 한미약품에서 기타비상무이사 직함을 갖고 있다.
◇신동국 “부당 경영 간섭 없어”
신 회장과 송영숙 회장 모녀 관계도 악화되고 있다. 신 회장은 경영권 분쟁 당시 송 회장 측과 주주 간 계약을 맺었다. 지분 매각 시 사전 협의 및 우선매수권을 보장하고, 위반 시 600억원의 위약벌금을 물기로 한 내용이다. 그러나 지난해 7월 한양정밀이 보유 지분을 담보로 380억원 규모 교환사채를 발행하면서 계약 위반 여부를 둘러싼 다툼이 이어지고 있다. 모녀 측은 사실상 지분 처분과 다름없다며 소송을 제기하고 신 회장 자택과 지분 일부를 가압류한 상태다.
하지만 신 회장은 최근 한미사이언스 지분 6.45%를 추가 매입했다. 주주총회에서 영향력을 강화해 정면 돌파하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그는 24일 서울 한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전문경영인 체제를 간섭하면 부당한 경영간섭이지만, 전체 이익을 위해 전문경영인의 잘못을 잡아주는 건 대주주의 역할”이라고 반박했다. 성추행 임원 비호 논란에 대해서도 “징계 방향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업계에서는 “지분 구조상 대주주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상황에서 전문경영인 체제가 얼마나 자율성을 유지할 수 있는지 시험대에 올랐다”는 평가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