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경북 영덕에서 수십 m 높이의 풍력 발전기가 무너지며 도로를 덮쳤다. 차량이 통행 중이었다면 참사로 이어질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8일 뒤에는 경남 양산의 풍력 발전기 날개 중심부에서 화재가 발생해 헬기 7대와 소방대원 82명이 긴급 출동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지난 19일 강원 태백의 태양광 발전소 내 에너지저장장치(ESS)실에서 난 불은 진화에만 18시간이 걸렸다. 200팩 넘는 리튬이온 배터리가 연쇄 폭발하는 ‘열폭주’를 일으키며 불씨를 끈질기게 되살린 탓이다. 인근 주민들은 산불로 번질까봐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모두 올해 2월 한 달 사이 잇따라 발생한 재생에너지 발전 시설 사고들이다. 하지만 국회는 지난 12일 안전 빗장을 오히려 푸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풍력이나 태양광 설비가 주택이나 도로와 일정 거리 이상 떨어지도록 제한해온 ‘이격거리’ 규제를 대폭 완화하는 내용이 핵심이다. 2030년 재생에너지 100GW 보급 목표를 위해 민가와 도로 코앞까지 재생에너지 발전 시설이 들어설 길을 열어준 것이다. 노후 풍력 발전기가 무너져 도로를 덮치고 태양광 발전소 ESS 화재 사고가 잇따르는 와중에 국민 안전보다 재생에너지 보급 속도에 더 방점을 찍는 정책을 택한 것이다.
◇풍력발전기 안전거리 규정 제각각… 그마저도 대폭 풀겠다는 정부
지난 12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신에너지 및 재생에너지 개발·이용·보급 촉진법’ 개정안의 핵심은 각 지자체가 조례로 운용해온 이격거리 설정을 제한하고, 정부가 정한 상한선 내에서만 허용하는 것이다. 기후에너지환경부 관계자는 “그간 지자체별 이격거리 기준이 제각각이고 과도한 측면이 있어 사업자들이 시설 확충에 어려움을 겪어왔다”며 “규제를 풀어 재생에너지 잠재 입지를 최대한 확보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문화재·생태 보호구역 등은 예외로 두기로 했으며, 개정안은 6개월 뒤부터 시행된다.
실제 전국 228개 기초지자체 중 60곳만 이격거리 조례를 두고 있었고, 기준도 도로 100m~2㎞, 주거지 200m~2㎞로 편차가 컸다. 현재 정부는 주거지로부터 200~300m 수준의 상한선을 검토 중인데, 이는 최대 2㎞ 이상 거리 제한을 뒀던 일부 지자체의 사례와 비교하면 규제 강도가 대폭 완화되는 셈이다.
이처럼 입지 문턱을 낮춘 배경에는 이재명 정부의 ‘2030년 재생에너지 100GW’ 목표 달성이라는 촉박한 일정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목표를 맞추려면 앞으로 매일 축구장 20개 면적에 태양광 패널을 깔거나, 4MW(메가와트)급 풍력 터빈 9기를 5년 내내 매일 세워야 한다. 규제 완화로 생활권 인접 설비가 급증할 것으로 예상되면서, 사고 발생 시 피해가 커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사고 느는데, 100GW 속도전은 가속
실제로 재생에너지 설비 사고는 이미 갈수록 잦아지는 추세다. 기후부에 따르면 풍력 발전기 사고 건수는 지난해 연간 3회였으나, 올해는 1·2월에만 벌써 3회가 발생했다. 태양광 발전소 화재 역시 2022년 19건에서 지난해 36건으로 급증했고, 올해도 2월까지 6건이 보고됐다.
용량 확대와 맞물려 보급이 가속화될 에너지저장장치(ESS)도 불안 요인이다. 기후부는 2030년까지 전국에 총 85개의 ESS를 구축할 계획이다. 지난 19일 태백 태양광 발전소 화재 당시 진화에 18시간이 소요된 원인이 배터리 연쇄 폭발인 ‘열폭주’ 때문이었음을 감안하면, 이런 위험 시설이 민가와 불과 200~300m 거리에 들어서는 상황에 대한 주민들의 긴장감은 높을 수밖에 없다.
더 큰 문제는 현재 가동 중인 노후 설비 상당수가 이미 ‘안전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2006년 이전에 설치된 노후 풍력 발전기 81기는 전부 이격거리 조례가 없는 지자체에 집중돼 있다. 최근 경북 영덕에서 도로를 덮친 발전기도 이 범주에 속한다.
◇노후·신규 가릴 것 없는 사고
그렇다고 신규 설비가 반드시 안전한 것도 아니다. 기후부가 김위상 국민의힘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4월 도괴 사고를 낸 경북 의성 금성산 풍력 발전기는 준공된 지 2년도 되지 않은 설비였다. 2023년 1월 사고를 낸 강원 정선 정암 풍력 발전기도 2018년에 가동을 시작한 비교적 최신형이다. 노후 설비는 물론 신규 설비조차 사고 위험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입지 제한마저 사라지게 된 셈이다.
기후부는 대부분의 국가가 이격거리 규정을 푸는 추세라고 해명하지만, 전문가들은 국토 면적이 좁은 한국의 특수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독일 바이에른주 등은 풍력 발전기 높이의 10배(약 1~2㎞)를 민가와 떼어놓는 ‘10H 규칙’을 고수하며 소음과 안전을 관리한다. 영국과 프랑스 역시 소음과 저주파 영향을 정밀 평가해 주민 수용성이 담보되지 않으면 설치 허가를 내주지 않는다.
박주헌 동덕여대 교수는 “재생에너지 설비가 생활 공간 가까이 확산되는 만큼 사고 시 영향 범위도 필연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다”며 “보급 속도전에 앞서 국민 안전까지 고려하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격거리 규제란
이격거리 규제란 태양광·풍력 등 재생에너지 설비를 주거지·도로·문화재 등으로부터 일정 거리 이상 떨어뜨려 설치하게 제한하는 것이다. 지난 12일 국회는 관련법을 개정해 원칙적으로는 이격거리를 두지 않아도 되게 규제를 완화했다. 문화재보호구역이나 생태·경관보전지역 등만 예외적으로 이격거리를 허용하고, 주거지나 도로 인근 등에선 이격거리가 지나치지 않게 상한도 뒀다. 하지만 그 여파로 안전 사각지대가 늘어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