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인공지능(AI) 반도체 시장을 움직이는 주요 인물 중 하나인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AI가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있다’며 글로벌 산업 생태계가 크게 흔들릴 수 있다는 경고를 내놨다.
AI라는 블랙홀이 메모리 반도체를 빨아들이며, 반도체 가격과 PC·스마트폰·가전 등 전자 제품 가격이 모두 치솟는 이른바 ‘칩플레이션(칩과 인플레이션의 합성어)’이 벌어졌고, 이것이 하드웨어 제조사의 강제 구조조정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전 세계 빅테크를 줄 세우는 ‘수퍼 을(乙)’이지만, 불과 몇 달 뒤 상황도 예측하기 어려운 극심한 불확실성에 시달리고 있다고 토로했다.
◇“AI가 모든 걸 무너뜨려”
최 회장은 20일(현지 시각) 미국 워싱턴DC에서 최종현학술원 주최 연례 포럼 ‘트랜스 퍼시픽 다이얼로그(TPD)’에서 “AI와 같은 신기술은 새로운 해결책인 동시에 모든 것을 무너뜨릴 수 있는 거대한 변동성을 동반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부친의 이름을 딴 최종현학술원의 이사장을 맡고 있다.
최 회장은 AI 반도체의 핵심, HBM(고대역폭 메모리)을 만드는 SK하이닉스를 예로 들었다. 그는 “작년 12월 시장에선 SK하이닉스의 올해 영업이익을 500억달러 이상으로 예상했는데, 올해 1월엔 700억달러, 지금은 1000억달러 이상으로 본다”며 “정말 좋은 소식 같지만, 이는 1000억달러 손실로 변할 수 있을 만큼 변동성이 매우 크다는 뜻”이라고 했다. 이어 “상황이 시시각각 변하고 있어 3년, 5년은커녕 1년 계획을 세우는 것조차 별 의미가 없다”며 “연초와 연말만 해도 너무 큰 변화가 있다”고 했다.
일례로 ‘메모리 가격 왜곡’ 현상을 꼽았다. 고부가가치 제품인 HBM의 마진이 더 클 것 같지만, 모두가 HBM 생산에 매달리면서 오히려 품귀 현상이 벌어진 범용 반도체 마진이 더 커졌다는 것이다. 그는 “HBM 마진은 60%인데, 일반 칩 마진은 80%로 HBM 대신 일반 칩을 파는 게 더 이익”이라며 “AI 인프라가 메모리 반도체를 모두 빨아들이면서 전혀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이라고 했다.
‘메모리 부족’이 빚어낼 산업계 변화에도 주목했다. 최 회장은 “PC나 스마트폰 제조사들이 반도체 부족으로 예전만큼 제품을 만들지 못하면서 일부는 아마도 사업을 접게 될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작년 1월만 해도 1.4달러에 불과했던 D램 가격은 현재 11.5달러로 1년 새 8배가 됐다. 시장조사 업체 트렌드포스는 “메모리 가격 인상으로 올해 스마트폰 생산량이 최대 15% 이상 줄어들 수 있다”고 예측했다. 메모리 반도체를 자체 생산하는 삼성이나, 프리미엄 모델 중심의 강력한 팬덤을 보유한 애플은 메모리 가격 인상을 어느 정도 흡수할 수 있지만 중저가 브랜드들은 타격이 클 것으로 예상된다.
최 회장은 이달 초부터 미국에서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 마크 저커버그 메타 CEO, 순다르 피차이 구글 CEO, 사티아 나델라 마이크로소프트 CEO, 혹 탄 브로드컴 CEO 등 빅테크 경영진을 잇따라 만났다. 그는 “현재 AI용 메모리 부족분(shortage)이 30%가 넘는다”며 “고객이 원하는 만큼 못 주는 상황이라 ‘미안하다’고 먼저 인사하러 간 것”이라고 했다.
◇“AI 전력 문제, 재난 될 수도”
AI 시대의 과제로 ‘에너지’와 ‘금융’도 꼽았다. 최 회장은 “AI가 우리가 필요로 하는 전기를 다 집어삼키고 있다”며 “전력 수요를 제대로 맞추지 못한다면 그 결과는 재난이자 사회 전체의 큰 도전이 될 것”이라고 했다. 또 미국에 필요한 AI 데이터센터 인프라에만 5조달러(약 7240조원)라는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가는 만큼, 돈과 자원을 갖춘 국가가 AI 경쟁의 선두 주자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AI 대전환기 속에서 한·미·일 3국이 도전 과제를 파악하는 데 그치지 말고, 긴밀하게 협력하며 실질적인 해법을 만들어가야 할 때”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