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가 끼어 있는 2월, 국내 주요 그룹 총수들은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이달 초 이재명 대통령이 주요 10개 그룹 총수를 소집한 자리에서 청년 일자리와 지방 투자 확대를 논의한 데 이어 유럽, 호주 등지에서 스포츠 외교를 펼치고 미국 빅테크 CEO(최고경영자)들과 반도체·AI 협력 확대를 위한 회동 역시 이어가고 있다. 연휴 직후엔 한국을 국빈(國賓) 방문하는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브라질 대통령과의 회동도 예정돼 있다.

이번 연휴 재계 총수들은 국내외에서 경영 구상에 몰두하는 한편 망중한(忙中閑)의 시간을 가질 것으로 전망된다. 올해 경영 환경 역시 작년과 마찬가지로 오락가락하는 대미 관세, 한국과 미국의 주요 선거, 고환율·고금리 등 변수가 많은 상황이다.

◇이재용은 유럽으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지난 5일 오전 동계 올림픽이 열리는 이탈리아 밀라노로 출국해 현재까지 유럽에 체류 중이다. 이 회장은 전날 이재명 대통령과 주요 그룹 총수 간 간담회에 참석하기 위해 출장 일정을 늦췄다. 현지 도착과 함께 5일(현지 시각) 저녁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주관하는 올림픽 갈라 디너 일정을 소화했다. 국내 유일의 올림픽 최상위 후원사(TOP·The Olympic Partner) 대표 자격으로 참석한 이 회장은 세르조 마타렐라 이탈리아 대통령, 커스터 코번트리 IOC 위원장, JD 밴스 미국 부통령 등 글로벌 정·재계 인사들과 교류하며 ‘스포츠 외교’의 최전선에 섰다.

5일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올림픽 갈라 디너 행사에서 이재용(뒷줄 오른쪽에서 셋째) 삼성전자 회장이 세르조 마타렐라(앞줄 맨 왼쪽) 이탈리아 대통령, 커스티 코번트리(앞줄 왼쪽에서 둘째) IOC 위원장, JD 밴스(앞줄 왼쪽에서 셋째) 미국 부통령 등 글로벌 정·재계 인사들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이탈리아 대통령실

이후 이 회장은 프랑스 파리에 머무는 모습이 목격되는 등 유럽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남은 연휴 기간 현지 사업장과 주요 판매 거점 등을 둘러보면서 휴식도 취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 회장은 명절 연휴에 주로 해외 사업장을 찾는 ‘글로벌 현장 경영’ 행보를 보여왔다. 2024년 설 연휴에는 말레이시아의 삼성SDI 배터리 사업장을, 2023년 추석 때는 이스라엘과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의 삼성전자와 삼성물산 현장을 찾았다. 명절도 없이 일하는 임직원을 격려하고, 현지 사업을 점검하는 차원이다. 재판 일정 등이 있었던 지난해에만 국내에 머물렀다.

◇최태원은 미국 체류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미국에 머물면서 글로벌 빅테크 CEO(최고경영자)들과 연쇄 회동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5일 실리콘밸리에서 젠슨 황 엔비디아 CEO를 만나 ‘치맥 회동’을 했고, 이튿날에는 혹 탄 브로드컴 CEO를, 10일과 11일에는 각각 마크 저커버그 메타 CEO와 순다르 피차이 구글 CEO를 만났다. SK하이닉스는 AI 반도체의 핵심으로 꼽히는 HBM(고대역폭 메모리)의 글로벌 강자인 만큼, 현지 파트너사들과 제품 공급 및 투자 협력 방안을 논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런 일정들 때문에 지난 4일 이 대통령과의 간담회에는 최창원 SK수펙스협의회 의장이 대신 참석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5일(현지 시각) 미국 실리콘밸리 한 식당에서 젠슨 황 엔비디아 CEO와 만난 모습. /SK하이닉스

지난 7일 이 대통령이 상속세 관련 ‘가짜 뉴스’를 유포했다며 최 회장이 수장(首長)을 맡고 있는 대한상의를 직격하면서, 미국 현지에서 사태 대응에도 나서고 있다. 최 회장은 12일 대한상의 임직원에게 서한을 보내 “경제 현상을 진단하고 정책 대안을 제시해야 하는 우리에 대해 근본적인 신뢰 문제가 제기된 것은 뼈아픈 일”이라며 “대한상의가 주관하는 모든 행사를 당분간 중단하고, 임원진 전원의 재신임을 묻겠다”고 밝혔다.

연휴 직후인 20~21일에는 워싱턴DC에서 열리는 국제 포럼에 참석한다. 최 회장이 이사장을 맡고 있는 최종현학술원이 주최하는 ‘트랜스퍼시픽 다이얼로그(TPD)’ 행사로, 한·미·일 주요 인사들이 모여 동북아와 태평양 지역의 현안을 논의할 예정이다.

◇정의선·구광모는 국내 머물러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이달 초 ‘기아 호주오픈 테니스 대회’가 열린 호주를 방문해 현지 정·재계 및 스포츠계 인사들과 교류했다. 기아가 단독 최상위 후원사를 맡고 있는 대회로, 카를로스 알카라스가 남자 단식 우승과 함께 역대 최연소 그랜드 슬램을 달성하며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정 회장은 2일 멜버른에서 열린 ‘기아 글로벌 딜러 컨벤션’에도 참석해 현지 파트너사들과 협력을 다졌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지난 2일(현지 시각) 호주 멜버른에서 열린 기아 글로벌 컨퍼런스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뉴시스

정 회장은 설 연휴에는 국내에 머무르며 경영 구상을 이어가는 것으로 전해졌다. 올 초 세계 최대 IT 전시회인 CES에서 휴머노이드 로봇 ‘아틀라스’를 선보인 이후 ‘로봇 기업’으로 재평가받은 현대차는 미국 자동차 관세 25% 재인상 이슈와 함께 자율주행차, 로봇의 경쟁력을 올해 비약적으로 키워야 하는 과제를 마주하고 있다. 또 로봇의 생산 현장 투입을 앞두고 노조의 거센 반발 역시 풀어야 할 숙제다.

구광모 LG그룹 회장은 3년간 끌어왔던 상속 분쟁에서 지난 12일 승소한 가운데 설 연휴를 맞았다. 다만 소송을 제기한 세 모녀 측이 곧바로 항소하겠다는 뜻을 밝힌 만큼 상당 기간 ‘재판 리스크’를 안은 채 경영을 이어 가야 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구 회장도 연휴 기간 국내에 머무르면서 경영 행보를 이어가는 것으로 전해졌다. LG 측은 “구 회장은 연휴 동안 AI 등 그룹 미래 사업 역량을 고도화하기 위한 중장기 경영 전략을 구상할 계획”이라고 했다.

구광모(오른쪽) LG그룹 회장이 지난 4일 청와대에서 열린 청년일자리와 지방투자 확대를 위한 기업간담회에서 정기선(왼쪽) HD현대 회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뉴시스

◇연휴 직후엔 브라질 대통령과 회동

연휴 직후인 22~24일에는 룰라 브라질 대통령의 국빈 방문이 예정돼 있다. 국내 주요 총수들은 23일 이 대통령이 주최하는 룰라 대통령 국빈 만찬에 참석할 것으로 전해졌다.

이날 오후 열리는 ‘한·브라질 비즈니스 포럼’에서도 국내 주요 기업과 브라질 기업 간 협력 확대 논의가 이어질 예정이다. 전략 광물, AI, 농업, 화장품, 스타트업 협력 등이 주요 주제다. 브라질 정부 측은 “룰라 대통령 방한 기간 서울에서 열리는 비즈니스 포럼에는 230여 브라질 기업이 참여해 경제·무역 관련 협력 확대를 위한 기회를 마련할 계획”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