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한국의 대다수 기업은 창업자의 강력한 리더십과 결단력에 의존해 움직였다. 이병철 회장이 이끈 삼성과 정주영 회장이 이끈 현대가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글로벌 시장에서 최고의 자리를 두고 다투는 지금 이들 기업은 총수 혼자 경영을 책임지기 어려울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총수의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각 분야를 관리하고 미래를 위한 최종 의사 결정에 핵심적 역할을 하는 이른바 ‘키맨(keyman)’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한국 경제를 이끄는 주요 기업들의 키맨을 소개하고 이들에게 주어진 역할과 과제가 무엇인지 짚어본다. [편집자주]

“2고로 안정조업을 주시옵소서.”(2013년 1월 14일)

“안정, 안전조업 감사 드립니다.”(2015년 4월 19일)

“무더위에 안전과 직원들의 건강을 지켜주심에 감사드립니다.”(2023년 8월 26일)

경북 포항시의 한 교회에 다니는 이희근 포스코 사장이 올린 감사 기도에는 ‘안전’이 자주 등장한다. 2019년 2월 포항제철소에서 크레인 끼임 사고가 발생했을 때는 사고 당사자의 가족과 사고 수습을 위해 기도했다. 뜨거운 쇳물을 다루는 철강업계에서 40년 가까이 일한 그는 누구보다도 안전을 최우선에 두며 업무를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희근 포스코 사장./포스코 제공

장인화 포스코그룹 회장이 ‘안전사고’로 회사 안팎이 소란했던 재작년 이희근 사장을 선임한 배경도 여기에 있다. 포스코가 2024년 12월 사장 선임을 발표했을 당시, 포항제철소는 제3파이넥스공장에서 화재가 한 달에 두 번이나 발생했다. ‘안전’에 대한 소명을 가진 인물이 절실했을 때다.

당시 장인화 회장은 임직원에게 “사고의 원인과 책임 소재를 철저히 규명하고 안전 정비 시스템도 면밀히 보완해 나가겠다. 설비 관리에서 한 치의 소홀함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이희근 포스코 사장(왼쪽 세 번째)이 지난해 6월 13일 광양제철소를 방문해 원료하역기 원격 운전 시연 현장을 직원들과 함께 둘러보고 있다./포스코 제공

◇30여 년 ‘포항제철소’서 쇳물 뽑아낸 현장 전문가

이 사장은 1962년생으로 1987년 포스코(당시 포항종합제철)에 입사했다. 그의 경력 대부분은 현장에 있다. 광양제철소에서 14년, 포항제철소에서 24년을 근무했다.

제철소에서는 핵심 공정인 ‘제선’을 주로 담당했다. 철강 제품은 크게 ‘제선→제강→압연’ 단계를 거친다. 제선 공정은 원재료인 철광석을 고로(용광로)에 넣고 뜨거운 바람을 불어넣어 쇳물을 만드는 것을 말한다.

이 사장이 관리직에 오른 건 2001년 포항제철소 제선부 원료기술팀장이 되면서다. 이후 2002년 제선부 소결공장장(부장), 2003년 1제선공장장을 맡았다. 2009년 기술개발팀장, 2012년 포항제철소 제선부장을 거쳤다.

2018년에는 선강담당 부소장을 맡았다. 선강은 제선·제강 등을 거쳐 반제품을 만드는 단계를 뜻한다. 포항제철소 선강 부문에서는 직원 1800여 명이 24시간 고로를 가동한다.

이 사장은 제선부장을 맡았던 2018년 현장의 문제점을 해결해 해양수산부 장관 표창을 받은 적이 있다. 낙광(컨베이어벨트 등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떨어진 광석) 없는 원료 공장 만들기 프로젝트를 펼쳐 원료 공장 일대의 분진 발생을 크게 줄인 데 이어 하역 설비의 성능 복원 활동에 성과를 낸 점을 평가받았다. 그는 한때 해양구조협회 임원으로도 활동한 바 있다.

포스코 관계자는 “이 사장은 포항제철소 제선부장 시절에 6년간 직원들에게 감사의 손편지를 쓰기도 했다”면서 “지금도 동료, 직원들에게 ‘감사하다’는 표현을 자주 하고, 지금껏 맺은 인연을 바탕으로 이 자리까지 왔다는 말을 자주 한다”고 했다.

이희근 사장은 지난해 3월 취임사에서 “포항제철소의 경쟁력 향상을 위해 공정, 제품, 품질 관련 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면서 “본질 중심, 현장 중심, 실행 중심으로 일하는 문화를 혁신해야 한다”고 했다.

이 사장이 수장에 오른 뒤 포스코는 수익성이 개선되고 있다. 포스코홀딩스에 따르면 지난해 포스코 별도 기준 영업이익은 전년 대비 20.8% 증가한 1조7800억원으로 반등했다. 매출액(35조110억원)이 약 6.8% 줄었지만, 구조적 원가 혁신으로 수익성이 개선됐다는 평가다. 이 사장은 글로벌 철강 불황을 맞아 설비 효율화와 에너지 절감, 원가 구조 개선, 디지털 전환 등 생산성 향상을 주도하고 있다.

2018년 포스코 포항제철소 제선부장이었던 이희근 사장(왼쪽)이 해양수산부 장관 표창을 받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옆에는 곽종건 당시 설비기술부장./포항제철소 제공

◇현장·학문 아우르는 ‘철강 명장’… 포스코 내 ‘기술통’

이 사장은 남성고(전북 익산)를 졸업해, 전북대 금속공학과, 포항공대 금속재료 석사를 거치며 철강 산업에 대한 지식을 쌓았다. 석사학위는 재직 중인 1998년 2월에 취득했다. 그의 지도교수는 고 이창희 교수로, 철강기술과 철강분야 산학협력을 이끈 인물로 평가된다.

이 사장이 포항공대에서 쓴 논문은 1997년 금속재료학회(현 대한금속·재료학회) 학술대회에서 발표되기도 했다. 그는 지도교수 등과 함께 ‘고로 조업 조건하에서 소결광 및 펠렛의 연화, 용융 거동’이라는 연구를 진행했다. 당시 포항제철소에서 사용하던 제선 원료들을 연화·용융 온도에 따라 분석해, 배합 비율에 따른 품질을 분석한 것이다.

그는 2004년 ‘기술 명장’들만 딴다는 ‘기능장’ 자격증을 취득했다. 금형제작기능장 시험에 합격한 것이다. 기능장은 기능사 취득 이후 8년 이상 실무 경력을 응시 자격으로 두고 있다. 현장 숙련도와 현장 관리자의 역량을 검증하는 시험으로, 현장에서의 전문성을 인정받았다고 볼 수 있다. 2005년에는 강창오 당시 사장으로부터 사내 ‘기술창의상’을 받기도 했다.

세계 최초로 인공지능(AI)을 접목시킨 포스코의 ‘스마트고로’도 이 사장의 손을 거쳤다. 2017년 포항제철소는 2고로를 스마트 고로로 운영하는 데 필요한 기반 기술 개발을 추진했다.

당시 제선부장이었던 이 사장은 용광로에 빅데이터 기술을 접목해 온도, 압력, 가스 성분 등을 분석하고 조업 결과를 예측하게 했다. 기존에 숙련공이 수동 제어했던 제철 공정이 자동화된 것이다.

2고로는 2019년 우리나라 공장 최초로 세계경제포럼(WEF)에 의해 ‘등대공장’에 선정된 바 있다. 등대공장은 WEF가 4차산업혁명 기술을 선도적으로 적용해 제조업의 미래 방향을 제시한 공장을 골라 선정한다.

한 철강업계 관계자는 “당시 포스코가 처음으로 스마트 고로를 도입한 뒤 철강업계에 이 노하우를 전하기도 했다”면서 “스마트 고로가 확산되면서 철강 생산량이 늘고 품질이 높아졌으며 안전도도 향상됐다”고 했다.

이희근 포스코 사장(가운데)이 지난해 7월 14일 포항제철소 내 QSS(Quick Six Sigma) 우수개소로 선정된 후판부 3후판공장을 방문해 직원의 설명을 듣고 있다. QSS는 포스코 전 직원이 일상 업무 속 낭비를 찾아 개선하는 혁신 활동이다./포스코 제공

◇수치로 증명된 ‘안전 전문가’, 위기의 포스코 구할까

풍부한 현장경험과 전문성을 갖춘 이 사장은 ‘인명 사고’로 위기에 빠진 포스코를 구해내라는 특명을 받았다. 장 회장이 올해 정기인사에서 이 사장을 유임시킨 것에 대해서도 안전 전문가로 신뢰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이 사장이 포스코 내 ‘안전통’으로 본격적으로 불리게 된 건 2023년 포스코 안전환경본부장에 임명되면서부터다. 이때 그는 전무에서 부사장으로 승진했고, 포스코 내 최고안전보건책임자(CSO) 역할을 했다.

이 사장이 안전환경본부장이었던 시절 포스코의 근로손실재해율(LTIFR)과 총기록사고율(TRIFR)은 각각 0.35, 1.67로 개선됐다. 2022년에는 각각 0.93, 1.73이었다. 근로손실재해율은 산업 재해 발생빈도 지표로, 100만 근무시간당 근로손실이 발생한 재해 건수를 뜻한다. 총기록사고율은 100만 근무시간 당 발생한 모든 사고자 수로, 예방적 안전 관리지표로 취급된다. 당시 중대재해 사고는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이후 설비강건화TF팀장으로 일하던 그는 포스코 그룹 내에서 ‘안전’이 화두가 되면서 포스코의 수장이 됐다. 당시 정기 인사에서 1963년 이전 출생 임원은 모두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이 사장이 ‘안전 위기’에 빠진 포스코를 구원할 수 있을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해 보인다. 그가 포스코 수장이 된 2024년 12월 이후에도 포항제철소의 안전사고는 이어졌기 때문이다.

포스코 사업장에서는 지난해 11월에만 유독가스가 유출돼 근로자가 흡입하는 사고가 2건 일어났다. 이때 포항제철소장이 해임됐고, 이 사장은 두 달간 이 자리를 겸임하기도 했다. 올해 들어서도 지난달 20일 계약직 직원이 포항제철소에서 제품 운반용 설비에 다리가 끼이는 사고를 당했다.

철강업계 한 관계자는 “최근 경영 실적 못지 않게 중요해진 것이 바로 안전 분야”라면서 “고전하는 철강산업을 일으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올해 재해를 획기적으로 줄이는 것이 이 사장 입장에서는 더 중요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포스코가 다른 기업보다 안전투자를 많이 하는 기업으로 알려져 있는 만큼 시스템을 잘 정비하면 재해를 대폭 줄일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이 사장은 물론 포스코 입장에서 올해가 안전 환경을 정비하는 데 매우 중요한 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