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차체에 면사포와 나비넥타이를 붙인 굴착기 2대가 나란히 서 있다. 그 위로 ‘우리 결혼했어요’라는 글자가 떠오른다. 국내 1·2위 건설기계 기업인 HD현대건설기계와 HD현대인프라코어가 합병해 출범한 ‘HD건설기계’ 광고다. 각 사가 만들던 굴착기를 신랑·신부로 의인화해 결혼식을 올리는 형식으로 합병을 알리는 광고를 만들었는데, 약 3주 만에 조회 수가 1억회를 돌파했다. 광고 기획은 1997년생 사내 직원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합병을 알리면서도 보수적이고 위계적일 것 같은 건설기계 기업 이미지를 바꾸는 게 핵심이었다.
조선·철강·정유·화학 등 이른바 ‘중후장대(重厚長大)’ 기업들이 무겁고 투박한 이미지를 바꾸기 위한 아이디어 경쟁을 벌이고 있다. 기술력이나 실적, 주가 등의 전통적인 지표 대신 감성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만들어 회사 알리기에 나서는 중이다. 특히 전통 제조업 기업들은 최근 수년간 새로 등장한 신생 IT·플랫폼 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기업 문화가 고루할 것이란 인식 탓에 좋은 인재를 확보하는 게 더 어렵다고 느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차원이기도 하다.
철강 기업 포스코는 지난해 10~30대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는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LoL)’ 국내 프로 리그인 LCK의 공식 후원사로 나섰다. 그러면서 게임 캐릭터가 사용하는 무기인 ‘다리우스의 도끼’를 포스코가 개발한 신소재인 고망간강으로 만들어 전시하기도 했다. 철에 다량의 망간을 첨가해 영하 196도의 극저온에서도 버틸 수 있는 강성이 있어, LNG(액화천연가스) 선박 연료 탱크의 핵심 소재로도 쓰인다.
반도체 소재, 물류, 건축 자재 등이 주력인 LX그룹도 작년 말 그룹 이름을 활용한 ‘엘엑씁니다’라는 광고를 제작했다. AR(증강현실) 고글, 유리창, 택배 등이 계열사가 만든 소재·서비스 등을 소개하며 “우린 씁니다”란 말을 반복해 그룹 이름을 잘 전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2021년 LG그룹에서 계열 분리했는데, 아직 이름을 낯설어하는 소비자가 많다.
또 다른 철강 기업 현대제철도 지난해 아이돌 그룹 에스파와 협업해 충남 당진제철소에서 신곡 뮤직비디오를 촬영했다. 에스파는 특유의 강렬한 이미지 덕분에 팬들 사이에서 ‘쇠 맛’ 아이돌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현대제철은 이런 에스파의 콘셉트와 ‘철’이라는 기업 이미지를 접목해 제철소를 홍보했다.
삼양그룹도 지난해 6월 배우 박정민을 모델로 발탁해 ‘스페셜티’ 편 기업 광고를 선보였다. 스페셜티란 삼양그룹의 식품·화학 계열사인 삼양사가 만드는 일반적인 범용 제품과는 차별화된 고부가가치 기술 집약적 소재를 말한다. 식품·화학·의약 바이오 등 핵심 사업을 대중 눈높이에 맞춰 쉽게 설명하고, ‘불닭볶음면’으로 유명한 삼양식품과 다르다는 점을 재치 있게 소개해 주목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