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2기 정부 출범과 함께 미·중 관세 전쟁이 재점화하던 지난해 3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일주일간 중국을 찾았다. 글로벌 CEO들과 함께 시진핑 주석을 만나는 일정에 앞서, 이 회장이 향한 곳은 베이징의 샤오미 전기차 공장이었다. 삼성 스마트폰을 중국 시장에서 사실상 밀어낸 경쟁사, 샤오미의 레이쥔 회장을 직접 만나기 위해서였다. 이 회장은 이후 중국 최대 전기차 업체 BYD(비야디) 본사에서 왕촨푸 회장도 만났다. 스마트폰에선 패했지만, 전기차·전장·반도체라는 새 전장에서 협력의 여지를 찾기 위한 행보였다.
이 회장의 당시 방중은 단순한 CEO 외교를 넘어, 대중 전략의 근본적 변화를 상징한다. 이른바 ‘중국 진출 2.0′ 시대의 도래다. 과거 중국은 우리 기업에 ‘진출만 하면 돈 버는’ 기회의 땅이었다. 그러나 2016년 사드(THAAD) 사태 이후 한한령과 팬데믹 봉쇄, 미·중 기술 패권 경쟁이 겹치며 한중 경제 협력은 급제동이 걸렸다. 한동안 ‘탈(脫)중국’은 기업들에 선택이 아닌 생존 전략으로 통했다. 실제 지난 1월 이재명 대통령의 방중에 동행했던 한 경제계 인사는 “수년 만에 중국 땅을 밟아본다”고 토로할 만큼 양국의 심리적 거리는 멀어져 있었다.
그사이 중국은 ‘모방자’에서 ‘추격자’로, 다시 ‘선도자’로 탈바꿈했다. 전기차와 배터리 공급망을 장악한 데 이어 첨단 반도체 설계 역량까지 키우며 우리 반도체 산업마저 위협하고 있다. 여기에 매 2년마다 한국 경제 규모(GDP)와 맞먹는 신규 내수 시장이 창출되는 중국의 광대성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흡인력이다. 경쟁하되 협력하지 않으면 글로벌 생태계에서 고립될 수 있다는 절박함이 우리 기업들을 다시 중국으로 이끌고 있다.
◇中 파트너와 시장 공략
변화된 전략의 핵심은 완제품 시장에서 정면충돌하기보다 중국의 핵심 공급망 속으로 파고드는 ‘수퍼 을(乙)’ 전략이다. 삼성전기가 대표적이다.
삼성전기는 지난해 세계 전기차 판매 1위 BYD로부터 차량용 MLCC(적층 세라믹 콘덴서) 공급 계약을 따내며 돌파구를 열었다. 스마트폰과 가전에서는 중국 기업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지만, 전장·반도체·디스플레이 영역에서는 중국 기업이 주요 고객이 될 수밖에 없다는 판단이 반영된 것이다. MLCC를 생산하는 삼성전기 중국 천진 법인의 매출은 2023년 2조9000억원에서 지난해 3조3000억원 수준으로 급증했다.
현대자동차 역시 철수 대신 ‘사업 구조 재설계’를 택했다. 점유율이 0%대까지 떨어진 내연기관차 대신, 중국 정부가 국가적 과제로 추진 중인 수소차 시장에 승부수를 던졌다. 현대차는 2023년 첫 해외 수소 생산 거점으로 중국 광저우에 수소연료전지시스템 법인을 설립, 연간 6500기 생산 능력을 갖췄다. 중국 수소차 시장은 태동기지만, 중국 정부의 ‘2035년 수소전기차 누적 100만대 보급 목표’에 맞춰 현지 기업과 협력을 늘려가고 있다. 작년 12월에는 중국에서 진행된 역대 수소버스 조달 사업 가운데 최대 규모 수주에도 성공했다.
◇단순 수출 넘어 현지 맞춤형 거점 확대
배터리 소재 기업들은 중국의 압도적인 원료 지배력을 인정하고 ‘공존’을 선택했다. 양극재·전구체·리튬·흑연 등 핵심 소재에서 중국의 지배력이 절대적인 상황에서, 탈중국은 선택지가 아니라는 판단이다. 에코프로그룹은 중국을 리스크가 아닌 필수 파트너로 재인식한 대표 사례로 꼽힌다. 중국 전구체 기업 거린메이와 전구체 기술을 공유, ‘전구체(GEM)-양극재(에코프로)’로 이어지는 밸류체인을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인도네시아 니켈 사업에도 공동 진출했다.
K-뷰티와 패션업계는 연구·생산·유통 전반을 현지에 뿌리내리는 ‘현지 완결형’ 모델을 안착시키고 있다. 코스맥스는 상하이에 연구와 생산, 마케팅 기능을 결합한 신사옥을 올해 준공하며, 현지 매출 6000억원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무신사는 중국 최대 스포츠웨어 기업 안타스포츠와 합작법인을 설립했고, LF 등은 상하이의 주요 상권별로 맞춤형 매장을 내는 ‘일상 침투’ 전략을 강화하고 있다.
지난 1월 이재명 대통령의 방중을 기점으로 산업계의 이 같은 움직임에는 더욱 탄력이 붙을 전망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우리 기업들에 중국은 성장을 위해 반드시 활용해야 할 거대한 플랫폼으로 재정의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