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중국 산업을 설명하던 ‘가격 경쟁력만 앞선 중국산’ ‘대륙의 실수’라는 표현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중국 기업들은 전기차·배터리·디스플레이·철강·석유화학 등 주요 제조업 전반에서 품질과 기술 수준을 끌어올리며 글로벌 시장의 핵심 플레이어로 자리 잡았다.

중국을 바라보는 우리 기업들의 인식도 극적으로 달라졌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지난해 국내 제조기업 370곳을 조사한 결과 “한국 기업의 기술력이 중국보다 앞선다”는 응답은 2010년 89.6%에서 지난해 32.4%로 급감했다. 15년 새 절반이 넘는 기업이 “중국에 따라잡히거나 추월당했다”고 본 것이다.

/그래픽=양진경

이 같은 변화는 주요 그룹 총수들의 대중(對中) 인식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지난해 중국을 찾아 시진핑 국가주석과 샤오미·BYD 경영진을 연쇄적으로 만났다. 이후 삼성전기와 삼성디스플레이 등 계열사들은 중국 전기차 업체를 경쟁자가 아닌 ‘고객’으로 설정하고 전장(電裝) 분야 협력을 확대하고 있다. 스마트폰·가전에서는 경쟁하되, 전장 부품과 소재에서는 중국 기업의 공급망 안으로 들어가는 전략이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발언도 같은 맥락이다. 최 회장은 최근 “중국과 경쟁만 할 것이 아니라 협력해서 제3국에 공동 진출하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다”며 “특히 환경 기술 분야에서 교류하면 서로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을 글로벌 시장을 함께 공략할 파트너로 재정의한 것이다. SK그룹이 지난 1월 올해 첫 토요 사장단 회의에서 중국 사업 전략 재점검에 나선 것도 이런 인식 변화의 연장선이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지난 1월 ‘한중 비즈니스 포럼’에서 “겸손한 자세로 중국에서 생산과 판매를 다시 늘리겠다”고 말했다. 지난해 11월 현대차 중국 합작법인 베이징현대 수장에 처음으로 중국인인 리펑강 총경리를 임명한 것도 상징적이다. 과거처럼 판매량 확대에 집착하기보다, 현지화와 역할 재정의를 통해 중국 산업 생태계로 다시 진입하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구광모 LG그룹 회장도 지난해 9월 사장단 회의에서 “우리보다 자본과 인력을 4배 이상 투입하는 중국 경쟁사를 이기려면 선택과 집중으로 구조적 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했다.

총수들의 인식 변화는 전략 변화로 이어지고 있다. 중국과 정면 승부가 어려운 분야는 과감히 줄이고, 기술 우위를 지킬 수 있는 영역에만 자원을 집중하는 흐름이다. 석유화학에서 구조조정이 가장 먼저 나타났고, 이차전지 소재에서도 일부 기업이 사업 철수와 투자 보류 결정을 내렸다. 반면 전장용 핵심 부품, 고성능 배터리 소재, 차세대 선박·에너지 기술 등에서는 기술 격차를 유지·확대하려는 투자가 이어진다.

재계 관계자는 “총수들의 인식은 이제 중국과 어느 분야에서 싸우고 어디서 협력할지를 냉정하게 가르는 단계로 넘어갔다”고 말했다. ‘중국 진출 2.0’은 중국으로의 단순 회귀가 아니라, 달라진 한·중 산업 역학을 전제로 한 전략적 재배치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