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부산 HJ중공업 영도조선소에 미 해군의 4만t급 군수 지원함 'USNS 아멜리아 에어하트'가 3개월간의 MRO(유지·보수·정비) 작업을 위해 정박해 있다. 이 함정 윗쪽에 보이는 배는, MRO를 위해 입항한 한국 해군의 대형 수송함 '독도함'이다. HJ중공업은 한국 해군·해경 함정 건조, 수리 역량을 바탕으로 국내 중견 조선사 중 처음으로 미 해군 MRO 수주에 성공했다. /HJ중공업

지난 20일 부산 영도구 HJ중공업(옛 한진중공업) 조선소 방산 구역 안벽(岸壁)에 거대한 회색 군함 두 척이 나란히 정박해 있었다. 한쪽은 태극기를 단 한국 해군의 대형 상륙함 ‘독도함’, 다른 쪽은 성조기를 펄럭이는 미 해군 군수지원함 ‘USNS 아멜리아 에어하트함(4만t급)’이었다.

한미 동맹을 상징하듯 어깨를 맞댄 두 군함의 선체 상태는 딴판이었다. 2007년 취역한 독도함의 선체는 매끈했지만 그보다 1년 늦은 2008년 취역한 에어하트함은 선체 곳곳이 녹슬어 있었다. 세계 최강 미 해군이 자국 함정의 수리를 왜 한국 조선소에 맡겨야 하는지, 그 이유가 한눈에 들어오는 장면이었다.

HJ중공업은 HD현대중공업이나 한화오션 같은 빅3가 아닌 중견 조선사 최초로 미 해군 MRO(유지·보수·정비)를 수주했다. 한미 해군 함정이 나란히 정비를 받는 ‘동맹 MRO’ 현장을 본지가 단독으로 취재했다.

◇주6일 美측 요구 실시간 반영

조선소 입항 9일차를 맞은 USNS 아멜리아 에어하트함은 수십 가닥의 굵은 케이블을 통해 전력을 공급받고 있었다. 전력 연결을 포함해 소방용수 호스 연결, 현문(출입 사다리) 설치 등 미 해군이 ‘제너럴 서비스(General Service)’로 부르는 기초 세팅을 마치고 이날부터 본격적인 정비에 돌입했다.

에어하트함이 정박한 안벽으로 이어지는 조선소 내 아스팔트 도로는 새로 포장한 흔적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440V 전압을 쓰는 한국 함정과 달리 505V 전압을 사용하는 미 해군 함정을 위해 도로를 뜯어내고 전력 케이블을 새로 매설한 것이다. 조선소 관계자는 “미 해군 일감을 받는다는 건 군함만 들이는 게 아니라 조선소 기준을 통째로 바꾸는 일”이라고 했다.

HJ중공업은 미 해군 MRO 시장 진입의 필수 관문인 ‘MSRA(함정정비협약)’를 맺기 위해 지난해 혹독한 실사를 거쳤다. 미 심사단은 조선소 내 CCTV가 중국산인지, 사각지대는 없는지까지 샅샅이 살폈다. 항만 테러 대비 태세는 물론이고, 하도급 업체의 재무 상태와 숙련공들의 이력까지 검증했다. 지용관 HJ중공업 상무는 “작업 중 발생하는 쓰레기를 어디서 어떻게 처리하는지, 심지어 휴지통 위치까지 모든 것을 검증 받았다”고 말했다.

이 모든 과정을 통과해 지난 19일 미 해군 보급체계사령부와 MSRA를 정식 체결했다. 이로써 향후 5년간 미 해군의 지원함뿐 아니라 전투함과 호위함을 아우르는 모든 MRO 입찰에 참여할 수 있게 됐다. 국내에선 HD현대와 한화에 이은 세 번째 성과다. HJ중공업은 빅3에 비해 규모나 인지도는 열세지만, 1974년 국내 1호 해양 방위 산업체로 지정된 이후 해군·해경 함정 건조·정비를 맡아오며 경험을 쌓았고, 그 저력을 바탕으로 이 관문을 통과했다.

◇MRO 발판으로 군함 건조 기대

현장에선 매일 오전 9시 미 해군 해상수송사령부(MSC) 감독관, 에어하트함 승조원 대표, HJ중공업 MRO 전담자가 머리를 맞댄다. 일요일만 뺀 주 6일 열리는 회의에선 당일 작업 내용과 안전 점검 항목, 향후 일정 등을 공유한다.

10년 넘게 조선업 장기 불황 여파를 겪다가 지난해 흑자로 돌아선 HJ중공업은 연간 20조원 규모로 추산되는 미 MRO 시장을 정조준하고 있다. 미 해군 MRO는 아직 물량 자체는 크지 않지만, 수주 경쟁이 치열한 상선 신규 건조와 달리 두 자릿수 영업이익률을 기대할 수 있다.

장기적으론 MRO를 넘어 미 군함 건조를 목표로 준비하고 있다. 현재 미 군함의 해외 건조는 불가능하지만, 미·중 해양 패권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미국 내에선 한국 등 동맹국에 함정 건조를 맡기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박영식 HJ중공업 고문(전 해군 준장)은 “미 해군 MRO는 미국 시장으로 들어갈 수 있는 현실적인 첫 관문”이라고 말했다.

☞함정정비 협약(MSRA)

미 해군 함정의 MRO(유지·보수·정비)를 위해 미국 정부와 조선사가 체결하는 협약. 이 협약을 체결하면 보안 규정이 까다로운 전투함 MRO 사업 입찰도 가능하다. 국내에선 한화오션, HD현대중공업이 체결했고 중견 조선사 중에선 HJ중공업이 처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