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투자사 그린옥스와 알티미어가 22일 쿠팡의 개인 정보 유출 사태와 관련해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를 예고하며 한국 정부에 제출한 ‘중재의향서(Notice of Intent)’에는 이번 사태 이후 한국 정부와 정치권이 취한 대응을 하나의 정치적·차별적 압박 시나리오로 묘사하는 내용이 상세히 담겼다. 이들은 한국 정부의 조치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을 뿐 아니라,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보기 힘든 수준의 행정권 남용이라고 주장했다.
◇ “제한적 데이터 유출을 구실로 한 전방위 공격”
의향서에서 미 투자사들은 쿠팡의 개인 정보 유출 사건을 ‘제한적 데이터 유출(limited data breach)’로 규정했다. ‘중국에 거주하는 쿠팡 전 직원이 내부 접근 권한을 악용해 약 3300만개 계정에 접근했지만, 실제로 내려받아 보유한 정보는 약 3000건에 불과했고, 금융 정보나 주민등록번호 등 민감 정보는 포함되지 않았다’는 쿠팡 측 설명을 의향서에 그대로 담았다. 그러면서 ‘한국 정부가 이를 계기로 쿠팡을 사실상 국가 차원의 조사 대상으로 삼아, 사업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수준의 제재와 압박을 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미 투자사들은 “중국과 한국 기업들과 경쟁하는 성공적인 미국 기업의 경쟁력을 제거하려는 시도”라고 표현했다.
의향서에서 가장 강한 표현 중 하나는 한국 정부의 대응을 “베네수엘라나 러시아 같은 전체주의적 적대 국가에서나 예상할 법한 일”이라고 규정한 대목이다. 대표적 민주 국가이자 핵심 동맹국인 한국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쿠팡이 ‘뉴욕증권거래소(NYSE)에 상장된 미국 기업이며, 자신들이 보유한 쿠팡 지분 가치만 15억달러를 넘는다’고 강조했다. 정부의 일련의 조치로 이미 수십억 달러 규모의 미국 투자금이 소멸됐고, 추가 조치가 이어질 경우 손실은 수백억 달러 규모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재명 대통령 발언, 반복 인용하며 ‘정치적 배경’ 강조
중재 의향서 전반에는 이재명 대통령에 대한 불신이 짙게 깔려 있었다. 문서는 이 대통령을 쿠팡 사태에서 가장 핵심적인 영향을 미친 인물로 지목하며, 과거 대선 과정에서 주한 미군을 ‘점령군(occupying force)’이라고 표현했고, 미국이 일본의 한국 식민 지배를 유지하도록 했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고 명시했다.
또 개인정보 유출 사건 이후 이 대통령이 쿠팡을 직접 겨냥해 “엄정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발언한 점, 과징금 상향 및 징벌적 손해배상 도입 검토를 지시한 점, “회사 존립이 불가능할 정도의 벌금” 발언 등을 했다는 점을 구체적으로 열거했다. 행정부 수반이 개별 기업을 향해 공개적으로 퇴출 가능성을 언급했다며 투자 안정성을 심각하게 훼손했다는 주장이다. 의향서는 인사 문제도 정치적 압박의 한 축으로 다뤘다. 네이버 출신인 한성숙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최휘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하정우 대통령실 AI미래기획수석 등을 거론하며, 경쟁사 출신 인사들이 정부 요직에 포진해 쿠팡을 겨냥한 정책·조사의 명분을 만들고 있다고 주장했다. 국회 차원의 움직임도 상세히 적시됐다. 국회 상임위와 청문회 과정에서 김범석 쿠팡 이사회 의장에 대한 출석 요구, 형사 고발·출국 금지 가능성 언급 등을 거론하며 “경영진 개인을 위협해 기업을 압박하는 행위”라고 주장했다.
◇“3000건 유출인데 3300만명 피해자처럼 몰아가”
개인정보 유출 규모에 대한 정부와 정치권의 설명도 집중적으로 문제 삼았다. 의향서에 따르면 실제로 데이터가 내려받아진 계정은 약 3000개에 불과한데, 한국 정부와 정치권은 이를 ‘3370만명 유출’로 규정하며 여론을 자극했다는 것이다. 미 투자사들은 이를 “사실과 다른 서사(false narrative)”라고 표현했다. 쿠팡이 실제 피해 여부와 무관하게 3300만명에게 1인당 34달러(약 5만원) 상당의 바우처를 지급했고, 총비용만 10억달러를 넘었다는 점도 강조했다. 이는 정부와 정치권의 압박 속에서 이뤄진 ‘과도한 비용 부담’이라는 주장이다.
의향서는 개인정보보호위원회, 공정거래위원회, 경찰, 국세청, 금융감독 당국, 고용노동부 등 최소 14개 정부 기관이 동시에 쿠팡을 조사·감사·수사하고 있다고 적었다. 데이터 유출과 직접 관련 없는 사안까지 조사 범위가 확장됐으며, 수백 명의 공무원이 투입돼 수백 차례 현장 조사와 자료 제출 요구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특정 기업을 겨냥한 ‘전체 정부 차원의 공격(whole-of-government assault)’이라고 표현했다.
의향서는 카카오페이, SK텔레콤, 업비트, 알리익스프레스 등 국내외 다른 대형 기업들의 개인정보·보안 사고 사례도 열거하며, 정부 대응이 쿠팡과 현저히 달랐다고 주장했다. 수천만 명의 금융·통신 정보가 유출된 사례에도 상대적으로 낮은 과징금과 제한적 조사에 그쳤다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한국 정부가 미국 기업에는 다른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며, 이는 한·미 FTA상 공정·공평 대우 의무와 비차별 원칙을 위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의향서는 또 “쿠팡이 한국 및 중국 경쟁사의 지배력을 위협한다는 점이 분명해지자 정부가 행정 권한을 무기화해 미국 기업(쿠팡)을 전례 없이 공격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린옥스와 알티미어는 의향서 말미에서, 지금과 같은 상황이 지속될 경우 세계은행 산하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나 유엔국제상거래법위원회(UNCITRAL) 규칙에 따라 중재를 제기해 수백억 달러 규모의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다만 최종 목표는 중재 자체가 아니라, “차별적·정치적 조치의 중단과 정상적인 경영 환경의 회복”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