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산업 ‘경쟁의 법칙’이 또 한 번 바뀌고 있다. 엔진(또는 모터) 출력이 아닌 ‘어떤 칩을 쓰고, 그 위에서 무엇을 구현하느냐’에 의해 완성차의 기술력과 기업 가치가 좌우되는 국면이 시작된 것이다.
지난 9일(현지 시각) 폐막한 세계 최대 IT·가전 전시회 CES 2026은 이런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준 현장이었다. 이번 CES에서 가장 두드러진 장면은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과 AI 반도체 기업 간 동맹·협력이었다. 현대차, 메르세데스-벤츠, BMW 등 주요 완성차 기업들은 엔비디아, 퀄컴 등과의 협력 계획을 전면에 내세웠다. 자동차가 ‘움직이는 고성능 컴퓨터’로 진화하면서 연산 능력, 즉 칩으로 기술의 무게 중심이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 장면이었다.
◇벤츠는 엔비디아, BMW는 퀄컴과 손잡아
올해 CES에서 가장 큰 주목을 받은 소식은 메르세데스 벤츠와 엔비디아의 협력이었다. 엔비디아는 지난 5일 자율주행 차량용 AI(인공지능) 모델 ‘알파마요’를 공개하고 이를 올 1분기 미국에 출시되는 벤츠 신형 CLA에 적용하겠다고 밝혔다. 알파마요는 경미한 사고 가능성까지 스스로 예측하고 판단하는 ‘레벨4’ 수준의 자율주행을 목표로 한다. 벤츠는 엔비디아의 소프트웨어 파워를 이식해 테슬라를 추월하겠다는 전략이다.
BMW는 다중 카메라와 레이더를 활용한 퀄컴의 자율주행 모델 ‘스냅드래곤 라이드’를 탑재한 신형 iX3를 선보였다. 이 자율주행 모델은 양사가 3년간 공동 개발했다. 주행 보조를 넘어, 도로 인프라와 보행자, 다른 차량과 실시간으로 정보를 주고받는 ‘차량 대 사물 통신’과 AI 기반 주차 기능 등을 제공한다.
현대차그룹 정의선 회장은 CES 기간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와 회동하고, 퀄컴 부스에선 로봇용 프로세서 ‘드래곤윙 IQ10’을 살펴봤다. 현대차그룹으로선 로봇 사업과 자율주행, SDV(소프트웨어 정의 차량) 사업에 고성능 AI 칩이 필수적이다. 현대차는 이미 엔비디아로부터 GPU 5만장을 공급 받기로 했고, 한국에 엔비디아 AI 기술센터와 현대차그룹 피지컬 AI 애플리케이션 센터 등을 설립하기로 했다.
◇전동화 넘어 자율화 시대로
완성차 업체가 AI 반도체 기업과 협력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자율주행 단계로 넘어가면 차량 스스로 처리해야 할 데이터 양과 복잡성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업계에 따르면 운전자 개입 없이 스스로 주행하는 레벨4 자율주행은 차선 유지나 스마트 크루즈 컨트롤 수준의 레벨2보다 10배 이상 많은 D램 용량이 필요하다. 반도체 기업 입장에선, 양산차에 칩을 탑재하면 대규모의 실제 주행 데이터를 확보할 수 있다. 이는 AI 모델 고도화와 차세대 칩 개발의 핵심 자산이 된다. 서로 윈-윈인 구조다.
이런 흐름은 후발 주자에겐 기회로 작용하고 있다. 중국 전기차 스타트업 리프모터는 CES에서 퀄컴의 차세대 칩을 탑재한 양산차 D19를 공개했다. 자율주행·인포테인먼트·차량 제어를 하나의 AI 컴퓨팅 시스템으로 통합한 것이다. 소프트웨어와 칩 중심 경쟁에서는 전통의 완성차 강자들이 누렸던 기술 장벽이 낮아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AI 열풍으로 데이터센터용 반도체 공급이 빠듯한 상황에서, 자동차 업계까지 고성능 칩 확보 경쟁에 가세하며 메모리 병목 현상은 심화할 전망이다. 트렌드포스는 올 1분기 범용 D램의 계약 가격이 지난 분기 대비 최대 60% 오를 것으로 내다봤다. 한 완성차 업계 관계자는 “앞으로 완성차 경쟁은 ‘누가 더 안정적인 반도체 공급망을 확보하느냐’의 싸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