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조선업계가 미국 해군 함정 유지·보수·정비(MRO) 시장에 일제히 뛰어들고 있다. HD한국조선해양, 한화오션, 삼성중공업 등 조선 ‘빅3’는 물론 중견 조선사들까지 관련 사업 준비에 나서고 있다. 단일 수주 규모는 작지만 마진율이 높고, 발주 사이클과 무관하게 지속적인 물량 확보가 가능하다는 점에서다.
미국에서 군함 정비 수요는 꾸준히 늘고 있지만, 미국 내 조선소의 인프라 노후와 인력 부족 등으로 대응 능력은 한계에 직면해있다. 미 회계감사원에 따르면, 해군 MRO 예산은 2020년 60억달러 수준에서 2023년 73억 달러까지 늘었다. 조선업계는 기술력과 납기 경쟁력을 앞세워 이 시장에서 미국의 신뢰를 받는 파트너로 자리매김한다는 구상이다.
◇새로운 시장으로 떠오른 함정 MRO
그동안 국내 조선소는 상선이든 특수선이든 ‘신조(新造)’ 중심의 산업 구조에 익숙했다. 선박을 새로 짓는 데 집중하며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키웠고, MRO는 보조 업무 정도로 취급됐다. 특히 함정 MRO는 군수 지원의 연장선 정도로 인식돼 왔다.
하지만 코로나 이후, 글로벌 공급망이 흔들리면서 인식이 바뀌었다. 미 해군을 비롯한 여러 나라 해군의 정비 일정이 줄줄이 밀리면서 ‘정비 인프라 부족’이라는 구조적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군함은 일반적으로 30년 이상 운용되고, 정기적인 정비나 개조가 필수다. 미 해군의 경우 매년 130~150척의 함정을 정비해야 하지만, 미국 내 조선소의 설비 노후와 생산성 저하로 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국내 조선소들은 이 시장에 속속 진입하고 있다. HD현대중공업은 지난해 1호로 따낸 MRO사업인 미 해군 군수지원함 ‘앨런 셰퍼드함’의 정비를 성공적으로 마쳤고, 추가로 ‘세사르 차베즈함’도 수주해 이달 두번째 정비를 시작한다. 이 시장에 가장 먼저 뛰어든 한화오션은 윌리쉬라함, 유콘함, 찰스 드류함 등 5척의 MRO실적을 확보하며 선두를 달리고 있다. 삼성중공업은 지난해 8월 미국 비거 마린 그룹과 MRO 사업 협력을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중견 조선사도 움직이고 있다. 부산의 중견 조선사 HJ중공업은 지난해 첫번째 미 함정 MRO 수주에 성공했고, 미 해군이 발급하는 MSRA(Master Ship Repair Agreement) 인증 취득도 앞두고 있다. 이 인증이 있어야만 전투함 같은 고난도 함정 정비에 참여할 수 있다. 해상풍력 전문 기업 SK오션플랜트도 국내 전투함 건조와 상선 MRO 경험을 바탕으로 MSRA 취득 마무리 단계에 있다.
◇미국 시장만 20조 규모
특히 함정 MRO는 보안·기술·품질 인증을 모두 충족해야 하는 진입장벽이 높은 시장이다. 국내 조선업계는 경쟁자가 제한적이고, 한 번 신뢰를 확보하면 장기간 거래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시장 전망도 밝다. 모도인텔리전스에 따르면, 글로벌 해군 함정 MRO 시장 규모는 2024년 577억 6000만달러(약 84조)에서 2029년 636억2000만달러(약 92조)로 커질 것으로 보인다. 업계 안팎에서는 이중 미국 시장만 20조 규모에 달한다고 추산한다.
특히 국내 조선사들은 인도·태평양 지역을 담당하는 7함대 소속 물량을 노리고 있다. 이 지역 물량은 일본이 주로 가져갔지만, 정비가 필요한 함정이 늘어나면서 국내 조선사들이 이 시장에 진출할 기회가 열리고 있다.
함정 MRO가 갖는 또 하나의 의미는 ‘비사이클형 수익원’이라는 점이다. 조선업은 신조 발주에 따라 실적이 크게 출렁이는 산업이다. 하지만, MRO는 발주와 무관하게 운용 중인 함정이 존재하는 한 수요가 계속 발생한다. 최근 글로벌 발주가 꺾이기 시작하면서, 국내 조선업계들의 안정적인 일감에 대한 수요는 더욱 커진 상황이다.
이런 미 함정 MRO 진출을 군함 건조 시장 진입을 위한 신뢰 축적 단계로 보는 시각도 있다. 장기적으로 군함 신조 파트너로 나아가기 위한 기반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지금의 정비 사업은 단순한 수리 계약이 아니라, 신뢰를 기반으로 군함 건조까지 이어질 수 있는 징검다리 역할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