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 호남발전특별위원회가 지난달 15일 광주시의회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반도체 기업 유치를 강조하고 있다. /뉴시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1000조원이란 천문학적 자금을 투입해 조성하는 ‘용인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가 지방선거를 앞둔 정치권의 ‘호남 이전’ 요구에 휘말리고 있다. 용인 클러스터는 부지 매입이 끝나 토지 보상이 진행 중이고 일부 현장은 착공까지 한 상태다. 그런데도 “반도체 산단 이전이 윤석열 내란을 끝내는 길”이라는 황당한 논리까지 등장하며 국가 산업 경쟁력을 위한 백년대계(百年大計)를 뒤흔들고 있는 것이다.

안호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전북 완주·진안·무주)은 4일 소셜미디어에서 “윤석열 내란을 끝내는 길은 용인 반도체 삼성전자의 전북 이전”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윤석열 내란은 전북의 미래를 파괴한 폭거였다”며 “수도권 이기주의에 맞서 싸워 삼성전자 이전을 반드시 이뤄내겠다”고 했다. 국회 기후에너지환경노동위 위원장인 그는 오는 6월 지방선거에서 전북지사 출마를 선언한 상태다.

안 의원뿐 아니라 호남에선 시민단체를 주축으로 ‘반도체 클러스터 새만금 유치 추진위원회’가 꾸려져, 이전 서명 운동에도 돌입했다. 지난달에는 전북을 지역구로 둔 의원들과 송전탑 반대 대책위 주민 수백명이 국회 앞에서 용인 반도체 국가산단의 전면 재검토를 촉구하기도 했다.

그래픽=백형선

◇대통령과 장관이 불 지펴

정부는 중심을 잡기는커녕 ‘호남 이전론’을 되레 부추기는 모습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달 10일 ‘K반도체 비전과 육성 전략 보고회’에서 “재생에너지가 풍부한 남쪽 지방으로 눈길을 돌려서 그 지역에서 새로운 산업 생태계를 구축하는 데 관심을 가져달라”고 했다. 2주쯤 뒤인 지난달 26일엔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이 “용인에 SK, 삼성전자가 쓸 전기량이 원전 15개 수준인데 꼭 거기에 있어야 할지, 지금이라도 지역, 전기 많은 쪽으로 옮겨야 하는지 고민”이라고 말해 파장이 일었다. 용인 클러스터의 경우 막대한 전력 조달이 관건인데, 그 열쇠를 쥔 대통령과 기후부 장관이 전력 문제 해법을 찾는 대신 이를 빌미로 반도체 전쟁의 최전선에 선 기업들의 발목을 잡는 형국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 전북 등 지역 정치권이 가세한 것이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는 500명 이상의 토지 보상이 진행 중이고, 일부 현장에선 이미 첫 삽을 뜬 상태다. 반도체 산단은 계획부터 준공까지 최소 8년이 걸리는 장기 사업이다. 중국이 이젠 반도체마저 한국을 추월하려는 위기 상황에서, 지금 판을 엎고 입지를 다시 선정하는 건 스스로 글로벌 경쟁 대열에서 이탈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더구나 반도체 클러스터의 호남 이전론이나 새만금 대안론을 뒷받침할 인프라는 사실상 전무한 상황이다. 반도체 공장은 전기와 용수가 생명이다. 새만금개발청에 따르면, 새만금의 현재 발전 용량은 태양광 0.3GW(기가와트) 수준이다. 삼성과 SK가 용인에서 필요로 하는 15GW의 50분의 1 수준이다. 지난달 김의겸 새만금개발청장은 2030년까지 이를 5GW로 높이겠다고 했지만, 이재명 대통령조차 “물리적으로 가능하겠느냐”며 반문했을 정도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전력 규모도 문제지만 0.01초의 정전도 허용하지 않는 반도체 공정 특성상 날씨에 따른 진폭이 큰 태양광이나 풍력에 의존하기엔 리스크가 너무 크다”고 했다.

◇반도체 현안에 ‘정치 논리’ 계속 결부

물 문제도 마찬가지다. 삼성전자 용인 반도체 공장 가동엔 하루 76만t의 물이 필요하다. 한강 수계(팔당댐)를 배후에 둔 용인은 일일 수십만t의 공업용수 확보가 가능하다. 반면 이전 후보지로 거론되는 새만금 지역 등의 경우 현지 댐의 여유 물량은 2만t 남짓에 불과하다.

반도체 초격차의 핵심은 석·박사급 고급 인력이다.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조사 결과, 관련 전공자의 73.2%가 수도권 근무를 희망했다. 공장은 옮길 수 있을지 몰라도 사람의 마음을 강제로 옮길 수는 없다. 억지로 입지를 지방으로 옮긴다면, 핵심 인재들이 외면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수백 개 협력사와 ASML, 램리서치 등 글로벌 장비기업 등 이미 수도권을 중심으로 형성된 반도체 생태계도 말 한마디에 옮겨올 수가 없다. 반도체 업계에선 호남이 인력, 용수, 생태계 등 인프라를 갖추는 데 최소 10년 안팎이 걸릴 것이라고 보고 있다.

반도체 석학인 황철성 서울대 석좌교수는 “지역 균형 발전 논리도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며 “아직 매립조차 완료되지 않은 (새만금 같은) 지역에 전력, 용수, 교통, 정주 여건을 모두 갖춘 반도체 클러스터를 조성하겠다는 것은 속도가 생명인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스스로 퇴장을 선택하는 셈”이라고 했다.

삼성을 포함한 대기업들은 비수도권에 지속적인 투자를 약속했지만, 현 정부는 주 52시간제 예외 같은 반도체 업계의 숙원에 ‘지방 투자 조건’을 결부시키는 등 부담을 지우고 있다. 한 재계 관계자는 “국가 존망이 걸린 전략 산업을 레고 블록 옮기듯 표밭으로 옮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라며 “반도체를 지역구 챙기기용 전리품처럼 생각하는 행태가 해도 너무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