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국내 산업계는 업종별로 희비가 엇갈렸다. 자동차와 석유화학 등은 미국의 고율관세 부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의 여파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조선과 방위산업 등의 업종은 글로벌 수요가 증가하며 호황을 맞았다. 2026년 글로벌 경제를 움직일 주요 이슈에 대해 짚어보고 이에 따른 업종별 영향을 전망해 본다. [편집자주]
“지난 몇 개월 간 상황이 크게 변했다. 전기차 사업을 축소하는데 195억달러(약 28조원)가 쓰일 예정이지만, 이를 감당해서라도 사업 구조를 재편하는 게 낫다고 봤다.”
짐 팔리 포드 최고경영자(CEO)는 지난해 12월 16일(현지 시각)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전기차 사업 축소에 나선 배경 두고 이같이 말했다. 포드는 대형 전기 픽업트럭인 F-150 라이트닝의 생산을 중단하고, 대신 하이브리드차와 내연기관차를 중심으로 사업 구조를 바꾸기로 했다.
포드의 가솔린 엔진·전기차 사업 부문 책임자인 앤드류 프릭은 “수익성이 없는 대형 전기차에 수십억달러를 더 투자하기보다 수익률이 더 높은 분야에 자금을 투입해야 한다”며 “전기차 사업은 예상보다 적은 수요, 높은 비용, 규제 변화로 인해 수익성이 낮아졌다”고 말했다.
완성차 업체 중 전기차 사업 축소에 나선 것은 포드 뿐이 아니다. 메르세데스-벤츠는 2030년까지 모든 신차를 전기차로 전환하겠다던 기존 목표를 수정했다. 볼보 역시 2030년까지 순수 전기차만 생산하겠다는 계획을 바꿔 플러그인 하이브리드차도 함께 생산하기로 했다.
완성차 업체가 전기차 전환 계획을 잇따라 수정하면서 국내 배터리 업계는 올해도 힘겨운 시기를 보낼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지난해 9월 전기차 보조금을 폐지했고, 유럽연합(EU)도 2035년으로 예정됐던 내연기관차 신차 판매 전면 금지 시점을 늦추기로 했다. 이에 LG에너지솔루션과 삼성SDI, SK온 등 국내 배터리 3사는 기대했던 성장 동력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졌다.
국내 증권사 배터리 담당 연구원들은 올해도 국내 배터리 업계의 한파가 지속될 것이라고 전망하며, 신속히 대안을 찾아야 할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조현렬 삼성증권 연구원은 “올해 전기차 수요는 2350만대로 지난해보다 9.4% 늘어나는 데 그칠 것”이라며 “지난해 전기차 수요가 전년 대비 20.7% 늘어난 것과 비교하면 전기차 시장의 성장세 둔화는 불가피해 보인다”고 말했다.
이안나 유안타증권 연구원은 “미국의 전기차 보조금 폐지로 올해 미국 전기차 판매량은 역성장할 가능성도 커졌다”며 “EU의 내연기관차 전면 금지 완화 조치까지 더해져 전기차 판매량 둔화가 예상된다”고 말했다. 그는 “서구권 전기차 시장은 ‘일시 정지’ 상태에 직면할 예정이라 배터리 업황이 살아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 美·EU, 전기차 진흥책 축소… ESS로 새 돌파구 모색
배터리 업계는 전기차 수요 감소로 줄어든 매출을 에너지저장장치(ESS)로 채워나갈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출범한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중국산 ESS용 배터리에 40.9%의 관세를 부과하면서 한국 배터리가 중국산을 대체할 기회가 생겼다. 중국산 ESS용 배터리에 부과되는 관세는 올해 58.4%까지 상승할 예정이다.
지난 2024년까지 북미 ESS 시장은 중국이 장악하고 있었다. SNE 리서치에 따르면 2024년 기준 북미 ESS 배터리 수요는 78기가와트시(GWh)였는데, 이 중 약 87%인 68GWh를 중국 CATL, BYD, EVE 등이 공급했다. 그러나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출범하고 중국산 제품에 고율의 관세를 매기면서 국내 업체들이 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기회가 확대됐다.
업계에서는 올해 글로벌 시장에서 한·중 배터리 업체들의 점유율이 크게 바뀔 수 있다고 전망한다. 국내 배터리 3사가 ESS와 중저가 전기차에 주로 쓰이는 저가 리튬인산철(LFP) 배터리를 본격적으로 양산하기 때문이다.
이안나 연구원은 “LFP 배터리 시장에서 한국 배터리 업체의 기술력이나 가격 경쟁력이 중국에 밀리는 것은 사실”이라면서 “그럼에도 미·중 갈등과 트럼프 행정부의 중국 규제에 따른 수혜를 국내 업체들이 볼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 ‘ESS 낙관론’은 시기상조… 美 경쟁사 가세, 中 저가 공세 가능성도
다만 미국 ESS 시장으로 실적 개선을 기대하기는 역부족이라는 의견도 많다. 전기차 부문에 비해 ESS 시장의 규모가 훨씬 작아, 전기차 배터리 수요 감소분을 메꾸기는 어려울 수 밖에 없다는 이유에서다.
조현렬 연구원은 “ESS 시장 확대는 전기차 배터리 부문의 줄어든 매출을 일부 상쇄하는 효과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며 “이마저도 올해는 국내 일부 업체에게만 해당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LG에너지솔루션은 이미 미국 공장에서 ESS용 LFP 배터리를 만들고 있는 반면 삼성SDI와 SK온은 올해 4분기가 돼서야 양산이 시작될 예정이다.
한국 배터리 3사가 경쟁하기에는 미국 ESS 시장이 너무 작다는 지적도 있다. 황규원 유안타증권 연구원은 “포드가 SK온과 합작 공장을 설립하는 대신 단독 공장에서 ESS용 LFP 배터리를 만들겠다고 발표했다”며 최근 완성차 업체들까지 가세해 경쟁이 심화되고 있다고 전했다.
조현렬 연구원은 “최근 중국 배터리 업체들은 관세를 감내하고도 한국 배터리 업체에 준하는 가격으로 ESS용 배터리를 미국에 판매하는 것으로 파악했다”며 “이는 트럼프 행정부의 중국 규제에 따라 얻게 될 국내 배터리 3사의 기회가 예상보다 적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고 말했다.
◇ 배터리 3사, LFP·삼원계 잇는 전고체 배터리 개발 주력
전기차 시장의 성장세는 최근 둔화됐지만, 시장 규모 자체는 계속 커지고 있다. 이에 국내 배터리 제조사들은 올해도 차세대 전기차 배터리 기술을 확보하는데 투자를 이어갈 것으로 관측된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전기차 배터리 수요가 지난 2024년 1테라와트에서 2030년 3테라와트 이상으로 급증할 것으로 예상했다. 지역적으로 보면 중국을 제외한 신흥 시장과 개발도상국의 전기차 배터리 수요 비중은 2024년 5%에서 2030년 10%로 커질 것으로 전망됐다.
배터리 업계에서는 저가형 LFP, 고가의 삼원계 배터리를 넘어선 다음 기술을 확보해야 중국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의견이 많다. 국내 배터리 제조사들은 삼원계 배터리 분야에서 중국보다 앞선 기술력을 갖췄다. 그러나 최근 전기차 시장에서 가격 경쟁력의 중요성이 커졌고, 삼원계 배터리의 경우 화재 위험성이 높아 국내 업체들은 한 걸음 밀려난 상황이다.
국내 업체들은 차세대 기술인 전고체 배터리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삼성SDI는 내년 상용화를 목표로 지난해 수원 파일럿 라인에서 대형 전고체 셀 샘플을 제작해 완성차 업체에 공급하고 성능을 평가 중이다. LG에너지솔루션은 오창 에너지플랜트에 파일럿 라인을 구축하고 양산 테스트를 하고 있다. SK온도 대전 배터리 연구원에 전고체 배터리 파일럿 플랜트를 준공한 상황이다.
이안나 연구원은 “내년 이후 상용화될 전고체 배터리는 포르셰, 메르세데스-벤츠 등 고급 전기차부터 적용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직까진 가격이 높아 전기차 시장의 주력으로 자리 잡긴 어려울 상황이지만, 여러 방식으로 가격을 낮춘다면 프리미엄 전기차, 휴머노이드 로봇 등 고부가가치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확보할 가능성이 크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