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1일 SK그룹의 배터리 제조사 SK온과 소재 기업 SKC가 나란히 “배터리 관련 사업 속도를 조절하기로 했다”는 취지의 공시를 냈다. 같은 날 포스코그룹의 이차전지 소재 계열사 포스코퓨처엠도 지난 2022년 미국 ‘빅3’ 자동차 회사 GM과 맺은 3년짜리 양극재 공급 계약 규모가 애초 발표의 20% 수준으로 줄었다고 밝혔다. 12월 들어 또 다른 배터리 제조사 LG에너지솔루션과 소재 기업 엘앤에프가 과거 수주한 배터리 관련 공급 계약이 사실상 백지화됐다고 발표한 데 이어, 마지막 날 악재가 또 잇따라 날아든 것이다.

그래픽=박상훈

전기차·배터리 업계에선 “이제 ‘캐즘(Chasm)’이란 말을 쓰기 어려워진 것 아니냐”는 반응이 나온다. 캐즘은 첨단 기술 제품에 대한 수요가 얼리어답터(신기술이나 새 제품을 일찍 경험하려는 계층) 중심에서 일반 소비자 전반으로 확산되기 전에 나타나는 일시적인 수요 정체 현상을 가리킨다. 하지만 최근 우리 배터리 업계가 2~3년 새 수주한 계약이 잇따라 취소되는 등 캐즘이 예상보다 길어지고 골도 더 깊어지는 등 구조적 불황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배터리 업계 줄줄이 사업 축소

SK온은 지난달 31일 충남 서산 3공장 증설 계획 연기를 밝혔다. 투자 금액은 1조7534억원에서 약 9363억원으로 절반 가까이 줄였다. 3공장은 2023년 착공 당시 “SK온의 국내 최대 규모 투자액을 바탕으로 기존 공장 대비 30% 넘게 생산 속도를 높인 스마트팩토리를 구축할 예정”이라고 밝힌 핵심 거점이었으나, 투자 종료 시점을 기존 2025년 말에서 올해 말로 미뤘다. 원래 올해로 예정됐던 공장 가동 시점은 아예 예측도 어려운 상황이다. 이차전지 핵심 소재인 동박을 만드는 SKC도 같은 날 차세대 양극재 사업 진출 계획을 공식 취소했다. 차세대 양극재는 이 회사가 2021년 발표한 중장기 성장 전략으로 삼은 신사업이었는데, 후발 주자로 양극재 시장에 뛰어들어 봐야 성공 가능성이 낮다고 본 것이다.

포스코퓨처엠은 지난 2022년 완성차 기업 GM에 약 3년 간 전기차 배터리용 양극재 13조7697억원 어치를 공급하기로 했었는데, 실제 2조8112억원 어치밖에 공급하지 못했다고 지난달 31일 공시했다. 이 회사는 시장 침체에 대응하기 위해 최근 포항 양극재 공장(사진)도 일부 LFP(리튬인산철) 라인으로 개조해 ESS(에너지저장장치) 수요에 대응하기로 했다. /포스코퓨처엠

이날 포스코퓨처엠이 낸 공시는 전기차 수요 둔화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2023~2025년 GM에 양극재 13조7697억원 어치를 공급하기로 했었는데, 실제 2조8112억원 어치밖에 공급하지 못했다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그사이 양극재 가격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원료인 리튬 가격이 크게 떨어지며 매출이 줄어든 것도 영향을 줬지만, 무엇보다 GM이 전기차 생산을 줄인 탓이 크다.

업계 관계자는 “전기차 캐즘이 시작될 2022~2023년 전후 맺은 계약들이 수요 침체로 진행되지 못하고 줄줄이 무산되고 있는 셈”이라며 “기업들이 연말 결산을 하며 더 이상 공개를 미룰 수 없는 사안들을 하나둘 고백하는 중”이라고 했다.

◇테슬라도 못 피해 간 침체

전기차 선두 주자인 테슬라 역시 침체 우려를 피해 가지 못하고 있다. 지난달 29일(현지 시각) 테슬라는 2025년 4분기(10~12월) 판매량이 42만2850대로 전년 대비 약 15% 감소했을 것이라는 시장 컨센서스(증권가 전망치)를 이례적으로 먼저 공개했다. 지난 2분기 판매량이 전년 동기 대비 13.5% 줄었을 때 ‘쇼크’라는 반응이 나왔는데, 이보다 감소 폭이 더 크다. 연간 기준으로도 올해 전체 판매량은 164만752대로 전년 대비 8.3% 줄어, 2년 연속 역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그 여파로 테슬라가 또 가격 인하 경쟁을 시작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이미 지난달 31일 한국 시장에서 테슬라는 주요 전기차 모델에 대해 최대 940만원 가격 인하를 단행했다. 중국 전기차가 가성비를 앞세워 해외로 쏟아져 나오는 상황에서, 테슬라발 전기차 가격 인하 경쟁이 또 시작될 경우 파장이 작지 않다. 한국과 미국, 유럽 기업들의 전기차 판매량이 감소하는 상황 속에서 배터리와 배터리 소재 기업들은 더욱 공급 단가 인하 압박을 받을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