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 국내 이차전지 소재 기업 엘앤에프는 2024~2025년 미국 테슬라에 3조8347억원 규모 양극재를 공급하는 계약을 맺었다고 공시했다. 하지만 지난 29일 이 회사는 “테슬라에 공급한 물량이 937만원 규모”라고 밝혔다. 사실상 거의 공급을 못한 것이다. 블룸버그는 30일(현지 시각) 테슬라의 전기 픽업트럭 ‘사이버트럭’에 사용될 배터리에 들어갈 소재였는데, 개발이 늦어지고 판매량이 저조해 엘앤에프가 타격을 입게 됐다고 보도했다. 업계에선 “미국 시장의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 정체) 여파를 피하지 못한 결과”란 반응이 나왔다.
한국 배터리 업계가 ‘공포의 12월’을 보내고 있다. 엘앤에프뿐 아니라 LG에너지솔루션도 배터리 공급 계약이 잇따라 해지됐다. 미국 배터리팩 제조사 FBPS와 지난해 4월 맺은 3조9000억원 규모의 전기차 배터리 모듈 공급 계약과 작년 10월 포드와 맺은 9조6000억원 규모 계약이 최근 보름 새 잇따라 없던 일이 된 것이다. SK온도 미국 포드와 만든 배터리 합작 법인을 지난 11일 해체했다고 밝혔다. 이런 악몽 같은 일의 진원지는 미국이다. K배터리의 주력 시장인 미국에서 전기차 시장이 급속도로 냉각될 조짐이 나타나면서 배터리 업계가 연쇄적으로 충격을 받고 있다.
◇美 전기차 시장에 무슨 일이?
한때 2022~2023년 연 50% 안팎씩 성장했던 미국 전기차 시장의 상승세는 이미 지난해부터 꺾이기 시작했다. 미국 아르곤국립연구소에 따르면 올 1~11월 미국의 전기차 판매량은 113만5552대로 전년 대비 2% 늘어나는 데 그쳤다. 특히 10월부터는 시장이 극적인 수준으로 냉각되기 시작했다. 1~9월은 매달 평균 전기차가 11만대씩 팔렸는데, 10월과 11월은 2개월 연속 판매량이 7만대를 밑돈 것이다.
10월부터 트럼프 정부가 전기차를 살 때 지원하던 세액공제(보조금)를 폐지한 것이 결정타가 됐다. 전기차 가격이 사실상 오른 것이나 다름없게 된 상황이다. 자동차 업계에선 10~11월의 전기차 판매 흐름이 고스란히 내년에 그대로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 22일 신영증권은 “내년 미국 전기차 판매가 올해 대비 16% 감소할 것”이라는 관측을 내놓기도 했다.
보조금 중단 전후 완성차 기업들은 바삐 움직였다. 지난 7월 혼다는 2027년부터 선보이기로 한 대형 전기 SUV 개발을 중단하고, 2031년까지 전기차·소프트웨어(SW) 개발에 투입할 자금을 10조엔(약 92조원)에서 7조엔으로 30% 줄였다. 현대차도 올 초 미국 조지아 메타플랜트에서 전기차 생산을 줄이고 하이브리드차 생산을 늘리기로 결정했다. 포드는 간판 차종인 전기 픽업 ‘F-150 라이트닝’ 생산을 중단하고, 내연기관차와 하이브리드차에 집중하는 쪽으로 사업 계획을 재편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런 시장의 분위기가 완성차 기업을 거쳐 이제는 배터리 업계로 전이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 배터리 기업 임원은 “완성차가 재채기를 하면, 배터리 기업은 독감에 걸리고, 배터리 소재 회사는 폐렴이 온다더니 지금이 바로 그런 상황”이라고 했다.
◇더 힘든 난관은 이제 시작
미국 자동차 시장은 내년 하이브리드차 중심으로 재편될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이 나온다. 올해보다 전기차 시장이 더 위축되면서 배터리 업계의 압박은 한층 더 커질 전망이다. 국내 배터리 기업들은 AI(인공지능) 전환에 발맞춰 수요가 늘어난 ESS(에너지 저장 장치) 사업에 공격적으로 나서고 있다. 하지만 주요 배터리 기업 모두가 이 분야에 뛰어들고 있어 경쟁이 치열하다. 포드의 경우 심지어 중국 CATL과 협력해 ESS의 미국 내 생산을 추진하고 있다. SK온이 배터리 합작 법인을 해체하면서 100% 인수한 미 켄터키주 공장이 생산지로 낙점됐다. 국내 기업들의 ‘안방’이라 여겨진 북미 시장마저 위협받게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전망이 반영되면서 배터리 기업들 주가는 최근 지난 10월 중순 이후 가장 낮은 수준까지 주가가 내려왔다. 테슬라 계약 내용을 공시한 엘앤에프 주가는 30일 전날보다 9.85% 내린 9만5200원에 거래를 마쳤다. LG엔솔과 삼성SDI도 각각 3.03%, 2.88% 하락했다. 한 배터리 업계 관계자는 “한국이 미래 첨단 사업으로 키워온 이차전지가 지금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도록 지원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