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터리 업계가 세밑 마지막 날까지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 정체) 공포’에 휩싸였다. 미국발(發) 전기차 수요 둔화가 장기화하는 가운데 31일 하루에만 SK온과 SKC, 포스코퓨처엠 등 이차전지 관련 기업들이 투자 순연과 사업 철회, 공급 부족 등 공시를 줄줄이 낸 것이다.
SK온은 충남 서산 3공장 증설을 연기하기로 했다. 모회사인 SK이노베이션은 이날 공시를 통해 SK온 서산 3공장 관련 투자 금액을 기존 1조7534억원에서 9363억9000만원으로 정정했다. 당초 세운 투자 계획의 절반 수준만 집행했다는 뜻이다. 투자 종료 시점도 2025년 말에서 2026년 말로 1년 늦췄다.
전기차 배터리 약 14만~16만대 안팎을 생산할 수 있는 이 공장은 2026년 양산 목표로 증설이 추진됐으나, 실제 가동은 2027년 전후로 밀릴 전망이다. SK온 측은 “시장 수요 변화에 맞춰 투자 금액과 시기를 유동적으로 조정한 것”이라며 “투자 철회가 아닌 순연 개념”이라고 밝혔다.
소재 분야에서는 아예 진출을 접는 결정도 나왔다. 동박 기업인 SKC는 장래 사업·경영 계획 공시를 통해 차세대 양극재 사업 진출 계획을 취소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2021~2025년 누적 투자 규모는 기존 5조원에서 4조4000억원으로 줄었다.
양극재는 전기차 주행거리와 출력, 성능 등을 좌우하는 핵심 소재로 꼽힌다. SKC는 지난 2021년 투자자 설명회에서도 중장기 성장 전략 중 하나로 차세대 음극재·양극재 사업 진출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글로벌 배터리 캐즘이 장기화하고 투자와 생산이 위축되면서 수익성과 불확실성이 커졌다고 판단한 것으로 풀이된다.
포스코그룹의 이차전지 소재 계열사인 포스코퓨처엠이 미국 완성차 업체 제너럴모터스(GM)와 계약한 물량 중 실제 공급한 규모가 20% 수준에 그친 것으로 나타났다. 포스코퓨처엠은 이날 공시를 통해, GM과 맺은 계약 금액이 13조7697억원이었지만 실제 공급은 2조8112억원에 그쳤다고 밝혔다.
포스코퓨처엠은 GM과 2023~2025년 전기차 배터리용 양극재 관련 공급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이 기간 양극재 핵심 원료인 리튬 가격이 약 90% 급락한 여파다. 매출액은 당초 계약 대비 20% 수준에 그쳤으나 판매량은 이보다 높을 것으로 추산된다. 포스코퓨처엠은 “주요 원료인 리튬 가격 급락, 미국 전기차 시장 성장 둔화 등 영향으로 공급 금액이 당초 계약 금액에 미달했다”고 설명했다.
새해에도 배터리 캐즘의 후폭풍이 가라앉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전기차 수요 회복이 늦어지는 상황에서, 지난 10월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보조금 폐지로 투자 집행을 늦추는 완성차 업체가 줄줄이 나오고 있어서다. 한 업계 관계자는 “12월 내내 이어진 배터리 캐즘 관련 공시들은 각사가 ‘버티기 국면’에 들어갔다는 뜻”이라며 “새해 상반기까지는 속도 조절이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