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의 ‘전기료 쇼크, 산업이 멈춘다’ 기획 시리즈가 5회에 걸쳐 진단한 한국의 산업용 전기 요금 문제는 ‘비싸다, 싸다’의 차원을 넘어섰다. 중국은 속도전으로 송전망을 깔고 파격적인 요금으로 자국 기업을 지원하는데, 한국은 ‘거북이’ 전력망과 경직된 요금 규제에 묶여 제조업 경쟁력이 위기로 내몰리고 있다.
본지는 문재인 정부 등에서 전력 산업 및 정책 최일선에 섰던 전문가 4인에게 해법을 물었다. 강승진 전 전기위원회 위원장(한국공학대 명예교수), 김종갑 전 한국전력 사장, 조영탁 전 전력거래소 이사장, 유승훈 전 전력수급기본계획 총괄분과위원장(서울과학기술대 교수)은 “전기 요금을 볼모로 잡는 ‘정치적 가격 결정’ 시스템을 멈춰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이들이 제시한 핵심 제언을 정리했다.
① 정치가 낳은 ‘콩보다 싼 두부’
지난 3년 국제 에너지 가격 폭등기에도 요금 인상을 억눌러 발생한 한전의 천문학적 부채에 대해 전문가들은 “뼈아픈 정책 실패”라고 규정했다.
김종갑 전 사장은 “콩(연료비)보다 두부(전기료)를 싸게 팔면 결국 두부 장수는 빚더미에 앉는다”며 “한전은 연간 이자 비용만 4조4000억원으로 국민 1인당 연 8만8000원의 빚을 지우고 있는 셈”이라고 비판했다. 조영탁 전 이사장도 “한전 부채가 206조원이고 하루 이자는 120억원 수준”이라며 “갚아야 할 빚을 다음 세대에 떠넘기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억눌린 인상 압력은 ‘산업용 전기 요금 폭등’이라는 기형적 청구서로 돌아왔다. 유승훈 교수는 “공기업 부채를 통해 비용을 숨기는 방식은 세대 간, 부문 간 부담 전가일 뿐”이라며 “결국 산업에 부담을 주게 된다”고 했다.
② 원가 무시한 체계 ‘생수로 빨래하는 식’ 낭비 낳아
정치 논리가 개입해 만들어진 ‘원가 무시 요금 체계’는 싼 전기는 낭비되고, 비싼 전기는 산업 경쟁력을 갉아먹는 자원 배분의 왜곡을 낳았다. 김종갑 전 사장은 “농업용 전기는 평균 요금의 절반 수준이다 보니 기업농들이 고급 에너지인 전기로 난방을 해 바나나 같은 열대과일을 재배하는 촌극이 빚어진다”며 “비싼 생수로 빨래를 하는 것 같은 국가적 자원 낭비”라고 말했다.
반면 기업들은 역차별을 받고 있다. 강승진 교수는 “산업용 고압 전력은 배전 비용이 들지 않아 원가가 가장 저렴한 게 정상인데 한국만 서민 생활 안정이라는 정치적 명분으로 산업용을 가장 비싸게 받는, 기형적 구조가 고착화됐다”고 꼬집었다.
시장 논리를 따르지 않는 요금 결정 체계는 기업 투자도 어렵게 만든다. 유승훈 교수는 “현재 전기 요금 체계는 기업에 장기적인 예측 가능성을 제공하지 못한다”며 “기업들에게 전기료는 ‘언제, 얼마나 조정될지 모르는 요금’일 뿐”이라고 했다.
③ 독립 기구가 투명하게 결정하는 시스템으로
미국·영국·프랑스 등과 마찬가지로 한국도 원가와 연동한 독립적인 요금 결정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는 데 이견이 없었다. 금융통화위원회가 금리를 독립적으로 결정하듯 독립 기구가 원가에 기반해 투명하게 요금을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영탁 전 이사장은 “정치권이 전기료를 통제하는 게 가장 큰 문제인 만큼 전문성과 중립성을 갖춘 독립 기구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고, 김종갑 전 사장도 “전기료를 정치에서 놓아주는 것이 (대안의) 출발점”이라고 말했다. 강승진 교수는 “요금 결정 과정에서 물가 당국인 기획재정부의 지나친 간섭을 배제해야 한다”고 했다.
유승훈 교수는 “물가 당국과 정치 변수 개입을 완전히 배제하기 어렵다면 정치적 재량 범위를 좁히고 절차를 투명하게 만드는 작업이라도 서둘러야 한다”며 “연료비 연동 공식과 조정 주기를 법으로 명확히 하고, 불가피하게 요금 조정을 유예할 때는 그 규모·기간·재원을 명시해야 한다”고 했다.
④ 경쟁을 통해 기업에 더 많은 선택권을 줘야
전문가들은 한국의 현재 전력 시장 시스템이 AI(인공지능) 중심의 디지털 전환과 탄소 중립 시대에 적합하지 않은 모델임을 정부가 빨리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궁극적으로는 전력 시장이 한전의 판매 독점 구조에서 벗어나 경쟁 체제로 가야 한다는 진단이었다.
유승훈 교수는 “재생에너지 확대와 데이터센터·전기차 증가 같은 변화 속에서 송전·배전·판매가 한 회사 재무에 묶여 있는 구조는 가격 신호를 왜곡하고 신규 투자를 막는다”며 “한전 기능을 송배전망과 공공성 중심으로 재편하고, 발전·소매 부문은 경쟁과 직접 구매를 확대해 나가야 한다”고 했다.
조영탁 전 이사장도 “다양한 사업자의 전력 판매 시장 진입을 허용해야 기업은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형태의 전력과 요금을 확보할 수 있다”고 했다. 강승진 교수는 “발전 사업자는 7000개에 달하는데 구매자는 한전뿐인 기형적 구조가 25년째 이어졌다”고 지적했다.
김종갑 전 사장과 조영탁 전 이사장은 “요금은 경제 논리에 맞게 움직이도록 두되, 급격한 요금 인상이 발생한다면 재정을 활용해 빈곤층이나 영세 기업을 돕는 구조가 구축돼야 한다”고 했다. 유승훈 교수도 “취약 계층·산업을 정교하게 지원하는 제도를 설계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