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반도체·철강·석유화학·정유 등 핵심 제조업계는 “산업용 전기료 인하도 시급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사용자(기업) 부담 중심’인 전력망 구축 체계를 국가 주도로 전환해야 한다“고 말한다. AI(인공지능) 확산과 탄소 중립 전환으로 전력 수요 폭증이 불 보듯 뻔한 상황에서, 개별 기업에 전력망 구축 비용까지 떠넘기는 현행 방식으론 글로벌 경쟁에서 필패(必敗)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반도체 업계는 한목소리로 ‘국가 주도의 안정적 인프라’를 강조했다. 반도체 업계 한 관계자는 “전기 요금 인하보다 중요한 건 안정적 전력 공급”이라며 “국가가 반도체 사업장을 전력 최우선 공급 대상으로 지정하고, 정전에 대비한 전용 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제조업계가 높은 전기 요금 부담에 직면한 가운데, 국가가 전력 인프라 지원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진은 금호석유화학 여수 고무2공장. /금호석유화학

반도체 경쟁국 대만은 세계 최대 파운드리 업체 TSMC 사업장까지 연결되는 발전·송전 시설을 정부가 나서 직접 구축했다. 덴마크 기업과 공동 조성한 해상 풍력 발전소에서 생산한 전력 1GW(기가와트)를 기업에 킬로와트시(㎾h)당 약 140원 수준으로 공급하고, 송전망 이용료의 90%를 정부가 부담한다.

반면 한국은 개별 공장이나 산업단지로 전력을 끌어오기 위한 송·배전선 연장, 변전소 신설·증설 비용을 ‘시설부담금’ 형태로 기업이 부담한다. 산업계는 “용인·평택 반도체 클러스터 등에 전력을 끌어오는 비용도 기업이 져야 한다”며 “정부가 송전선로 지중화 비용 70% 지원을 약속했지만 경쟁국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한 경제 단체 관계자는 “주요국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인프라를 직접 구축·운영하지만, 한국은 기업 부담이 과도하다”며 “사용자 중심에서 공급자(국가) 중심으로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AI 데이터센터(DC) 전력망 구축도 발등의 불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2026년 전 세계 데이터센터 전력 소비량은 1050TWh(테라와트시)로, 2022년(460TWh)의 두 배를 넘어설 전망이다. 업계에서 “개별 기업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의견과 함께 “전력망 인프라 지원이 절실하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중국의 저가 공세와 비싼 전기료에 따른 고비용 구조로 이중고에 시달리는 석유화학·정유 업계는 ‘분산 에너지 특구’ 사업의 빠른 시행을 원하고 있다. 먼 곳의 대형 발전소 전기를 한전 송전망을 통해 비싸게 사 쓰는 대신, 가까운 지역 내 발전사에서 전기를 직접 구매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송전 비용을 낮춰 원가 경쟁력을 확보하겠다는 복안이다.

철강업계는 지금의 고로 생산에서 탄소 배출을 줄인 수소환원제철로 전환할 경우 전력 비용 폭탄을 가장 우려한다. 현재 전력 구입 비용도 포스코는 연 5000억원 이상, 현대제철은 연 1조원에 이른다. 일시적인 전기료 인하, 감면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구조다.

철강업계 한 관계자는 “철강 탈탄소화를 국책 과제로 삼고 대폭 지원에 나선 해외 국가 같은 지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독일은 철강업계 탈탄소화를 위해 직접 보조금뿐 아니라 세제 혜택, 저리 융자 등 10조2000억원 규모의 패키지 지원을 한다. 일본도 기업 단독으로 투자하기 어려운 대규모 전환 사업을 위해 3조5000억원 규모의 기금을 조성해 지원하고 있다. 한국 정부의 비슷한 지원금은 약 2000억~3000억원 규모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