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장례식장에서도 일회용품 사용을 금지하는 등 강력한 ‘유럽연합(EU)식 플라스틱 규제’ 도입을 예고한 가운데 EU가 역내 재활용 산업 보호를 위해 저가 플라스틱 수입 단속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또 철강, 화학 등 에너지 집약 산업에는 이산화탄소 배출권 거래 비용을 보조해주는 등 환경 규제를 완화하는 정책을 발표했다.
◇중국산 플라스틱에 EU 재활용 산업 ‘흔들’
23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EU가 중국 등 제3국에서 들어오는 저가 플라스틱 수입 단속을 강화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제3국에서 재활용 플라스틱 품목으로 수입되는 원자재 중 실제 재활용 상품이 아닌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예시카 로스웰 EU 환경 집행위원은 “EU는 (역내 기업이) 공정한 경쟁 무대를 필요로 하고 있다”며 “유럽으로 들어오는 수입 플라스틱 중 실제 재활용 플라스틱이 아닌 경우가 많고, 우리는 정보가 부족하다”고 했다.
EU는 2000년대 들어 강력한 플라스틱 규제를 시행하면서 재활용 플라스틱 사용률을 높이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중국 등 제3국에서 수입되는 재활용 플라스틱의 양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역내 재활용 기업들의 가격 경쟁력을 잃게 됐다. 로스웰 집행위원에 따르면 지난 18개월 사이 네덜란드에서만 재활용 공장 10곳이 문을 닫았다. EU 전역에서는 약 100만t 규모의 재활용 공장이 멈춰 섰는데, 이는 프랑스가 연간 배출하는 플라스틱 폐기물 규모와 맞먹는다.
EU는 앞으로 재활용 플라스틱과 일반 플라스틱을 구분하기 위한 새로운 통관 부호를 부과하고 검사를 강화한다는 계획이다.
◇기업 역외 이전 우려에 한발 물러선 EU
EU는 또 이날 생산 과정에서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는 배터리, 유리 등 산업에 전력 가격 보상을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철강, 화학 등 이미 지원을 받는 기업들에도 보조금을 추가하기로 했다. 이들 기업이 부담하는 이산화탄소 배출권 거래 비용을 간접적으로 줄이는 조치다.
EU는 기업의 온실가스 배출량에 값을 매겨 기업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탄소를 감축하도록 하는 배출권 거래 제도(ETS)를 2005년 세계 최초로 도입해 시행하고 있다. EU 전체 온실가스 배출량의 약 40%를 차지하는 전력, 산업, 항공 부문에 배출권 할당량을 부여하고 거래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유럽환경청의 2025년 탄소 시장 보고서에 따르면 EU ETS 대상 부문의 탄소 배출량은 도입 시점 대비 약 50% 가량 줄어드는 등 정책은 실제 효과를 발휘했다. 문제는 규제를 피하기 위한 에너지 집약 산업의 역외 이전이 동시에 증가했다는 사실이다. EU는 배출권 가격이 최근 수 년 사이 지속적으로 상승하면서 기업의 역외 이전이 가속화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유럽식 환경 정책, 각국 맥락 고려해야”
세계적으로 가장 강력한 환경 규제를 시행하고 있는 유럽에서도 산업계와 시장의 반발로 규제가 완화되거나 지연된 경우가 많다. 영국의 공병 보증금 반환제(DRS)는 2018년부터 도입을 추진했지만 도입이 지연된 대표적인 사례다. 영국 가디언에 따르면, 이 제도는 당초 올해부터 시행될 예정이었지만 지난해 2027년 10월로 도입 시기가 세 번째 지연됐다. 영국 환경식품농촌부는 당시 “식음료 업계의 부담이 너무 크다”며 도입 지연과 함께 유리병 제외를 선언했다.
DRS는 소비자가 병이나 캔을 반납할 때마다 소액의 현금을 지급함으로써 재활용률을 높이는 것을 목표로 한다. 가디언에 따르면, 영국 내에서 연간 약 130억개의 플라스틱 음료수병이 소비되지만 이 중 재활용되는 것은 75억개에 그친다. 나머지 55억개는 매립되거나 소각된다.
올해 2월부터 시행된 EU의 포장재 규정(PPWR)도 당초 계획보다는 완화됐다는 평을 받는다. EU는 이 정책 내에 패스트푸드점 내 일회용품 용기 사용을 전면 금지하는 내용을 담았지만, 맥도날드 등 패스트푸드 업계에서 “다회용 플라스틱 컵보다 일회용 종이컵이 낫다” “다회용기를 세척하는 데 들어가는 물 낭비가 더 심하다”는 등의 반발을 샀다.
유럽 최대 규모의 환경시민단체 연합체인 유럽환경국은 PPWR 도입과 관련해 지난 5월 웨비나를 갖고 “유럽의 정책이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환경 규제에 영감을 줄 수 있겠지만, 각 국가의 맥락에 맞는 조정(adaptation)이 필수적”이라고 했다.